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Dec 18. 2016

꿈이 저당 잡힌 시대의 직업관

영화 <10분>, 10 Minutes, 2013

잡일 하는 20대의 전화

운전하다가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DJ 김신영의 전화를 받은 20대 여성 직장인이 자기소개를 한다. 사무실에서 잡일 하고 있는 아무개입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업을 말한다. 김신영과 운전을 하는 나 동시에 당황한다. 김신영은 그녀에게 왜 자신의 직업을 그렇게 말하느냐고 장난스레 묻는다. 당연하다는 듯 그녀는 자신이 진짜 심부름이나 하며 직장 생활한다고 말을 한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투였다. 그것은 겸손의 미덕이 아닌 자괴가 담긴 불쾌함을 자아냈다. 두 사람의 통화는 짧게 끝났지만,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생각나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전화 속 어린 여성은 자신이 이 어려운 시대에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아니면 잡일이면 어때 그게 숨길 일인가 되려 주눅 들지 않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리라. 지금 대한민국에선 부모님 등골 빼먹는 고학력 좀비들이 서울에도 수두룩한 상황에서 일이라도 하니까. 비록 상고 나왔지만 비싼 등록금도 안 치르고, 이렇게 잡일이라고 하고 있으니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사회가 지금 딱 그런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저 오늘 하루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휴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는 상황.

연애의 온도Very Ordinary Couple (V.O.C.), 2012

상업영화가 직장생활의 리얼리티 구현에 실패하는 이유

난 영화를 정말 많이 본다. 영화가 시대를 투영하는 거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생활만큼은 제대로 표현하는 영화를 찾기 어렵다. 극의 구현을 위한 수반 사항에 직장을 넣을 뿐이지. 직장생활의 고충이 그 애환이 극에 녹아드는 경우가 흔치 않다. 가령, 연애의 온도를 보자 보수적인 은행을 마치 짝짓기의 장처럼 보인다. 남주가 직장 상사 아구창을 날려도 무사히 다음 날 출근하고, 여사원은 상사와 원나잇을 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연애 문제로 노닥거리기뿐이고, 야근도 없는지 퇴근하면 어김없이 술자리를 가진다. 영화 자체가 연애를 위한 이야기니 지리멸렬한 부분은 대략 생략이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디 우리의 삶에서 일과 직장을 빼고 연애가 가능하기는 한 건가? 만약 <연애의 온도>가 직장생활의 리얼리티만 어느 정도 보장됐다면 지금보다는 내 마음속에 별 한 개는 더 칠해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연애는 직장생활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야근 때문에 기념일을 넘기기도 하고,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연애를 하는 상대에게 쏟아놓고 후회한다. 깨어있는 시간의 60% 이상을 직장에서 보내면서 어찌 연애라고 직장을 외면하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10분, 독립영화 직장생활의 고충을 말하다.

상업영화는 대부분 직장의 고충을 세밀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만드는 사람들이 직장을 다닌 적이 없다시피 하고,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영화 자체가 현실의 도피수단으로 소비되는 게 상업영화의 법칙 중 하나다 보니 구체적인 직업관이 영화에 투영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독립영화는 상업영화보다는 직장생활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작가 그리고 배우들 중 지금도 투잡을 뛰거나, 직장생활을 하다가 꿈을 찾기 위해 다시 영화판을 찾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워낙 제작비 조성이 어렵다 보니, 감독과 스텝을 비롯한 개개인의 임금을 제대로 책정하기 어렵다. 다 배우는 거라며 품앗이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니까. 그래서 또 다른 직업이 필요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인턴이나 비정규직을 통해 돈을 번다.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영화 <10분>의 감독 이용승 감독도 이 영화를 자신의 감독 데뷔 전 6개월 동안 근무한 공공기업체에서의 인턴 경험을 바탕으로 기획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용승 감독은 25살 늦은 나이에 중앙대 영화과에 입학했다. 그 전에는 영화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는데, 자신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영화 속 주인공 맏아들 호찬처럼, 막내 여동생이 회사를 다니며 집안의 생계를 도왔다고 한다. 영화 10분에서는 유독 꿈을 포기하는 이유와 가난한 집안 형편의 상관관계가 마치 함수처럼 관객의 이해를 쉽게 얻어간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의 일련의 경험들이 준 상처가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10분, 10 Minutes, 2013
방송국 PD를 희망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지방 이전을 앞둔 공공기관에서 6개월 인턴으로 일하게 된 강호찬(백종환 분). 사무실 내 허드렛일은 물론 야근까지 도맡아 하는 호찬을 눈여겨본 부장(김종구 분)과 노조지부장(정희태 분)은 호찬에게 정규직을 제안한다.

호찬은 꿈과 현실 중 오랜 고민을 하던 중에 결국 공공기업체에 근무하기로 한다. 아마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공공기관은 비교적 편한 근무여건에 영화 속 표현대로 자기 일만 하면 철밥통이 보장되는 곳이니까. 놓치기 어려운 기회다. 자신이 정규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호찬은 가족들의 선물을 산다. 그래 이 맛에 일하는 거지. 꿈이 대수냐 오늘 하루 밥 잘 먹어야지. 호찬은 여자 친구에게도 자신이 꿈을 버렸음을 통보하고, 노동의 가치에 그저 몸을 맡길 것을 다짐한다. 호찬은 겉으로는 안정성을 위해 꿈을 버렸다고 했지만, 정작 꿈을 포기한 진짜 이유는 자신도 알기 어렵다. 세상은 다 그런 거라며 빈정대는 말투로 마치 인생을 통달이나 한 듯 지껄여대는 선배 말은 믿기 어렵다. 호찬에게 기성의 논리란 아직도 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영화 10분, 10 Minutes, 2013

을을 위한 공간은 어디에서 없다.

어디 직장생활이 내 생각대로 풀릴 리가 있나. 그가 정규직으로 전환될 자리에 낙하산이 등장한다. 졸지에 정규직의 꿈에 부풀어 있던 호찬은 원장의 빽으로 들어온 송은혜 씨의 조수가 되어버린다. 영화에서는 이 과정을 우리가 사회에서 느끼는 각가지 각양각색의 인물상이 전형적인 틀 안으로 녹아드는 형태로 묘사했다. 가령, 옆에서 부당하다며 노조에서 나서야 한다고 바람을 잡는 그녀, 그에 마음이 동해 호찬의 편이 되는 척하다가 복지부동하는 중간관리자. 충고한답시고 사람 맘 긁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옆자리 인턴까지. 호찬이 마치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회사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러 가는 샷은 이 혼돈의 극점이다. 호찬의 뒷모습은 벌써 죽어버린 듯 그림자가 없다. 

영화가 말하는 조직 안에서는 내 일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내 믿을 구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버려진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영화에서는 라스트신에 내게 익숙한 공무원들의 지진대비 훈련을 삽입했는데, 이 장면이야말로 내 살 구멍을 확보하지 못하면 10분이라는 시간도 감히 버틸 수 없는 직장인의 냉정한 논리를 적확하게 은유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호찬은 2차 정규직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이 꼴을 다 보고도 안정성이라는 논리 안으로 침잠했을까. 아마도 기꺼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또 옆자리 노조지부장은 선배랍시고 다 추억이고, 인생 경험이라며 호찬을 다독이겠지. <10분>은 이게 남의 일이면 그냥 슬플 텐데 남의 일 같지 않아 아픈 영화다.

영화 10분, 10 Minutes, 2013

우리는 오늘도 출근해서 무사히 퇴근시간까지 별 일 없기를 바란다. 퇴근 후 단 몇 시간 동안 시간 동안 취미생활을 하거나, 그녀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안정적인 직장 생활 없이 취미와 사랑이 가능할까. 영화 <10분>은 우리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팝콘을 씹으며 잠시 잊으려고 했던 직장생활의 냉혹한 논리를 1시간 30분 동안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영화가 삶의 무게감을 잠시 덜어내는 행위라고 믿는다면 최악의 영화가 될 것이고, 2차 담론의 생성으로 삶을 환기시키는 용도라고 믿는다면 이 영화의 10분 이상의 가치를 지닌 영화가 될 것이다. 난 다행히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우리 호찬이를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내가 포기했던 꿈과 첫 월급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한참 동안 지하철에서 바라보았던 앞자리 그 사람을.

작가의 이전글 커피 한잔이 하루에 끼치는 영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