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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8. 2016

커피 한잔이 하루에 끼치는 영향


 난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보다는 하루짜리 막노동을 선호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는 대학 생활을 버텨낼 수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까르보나라도 사줘야 했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분홍색 스푼을 꽂고 달콤한 얘기도 나눠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악어 피케셔츠를 사 입어야 했고, 곧 죽어도 커피는 스타벅스였으니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편의점 알바 같은 건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 흔한 극장 알바나 주유소 일도 못 해봤다. 늘 돈이 급했던 나는 하루 뼈 빠지게 고생하더라도 10만 원이 훌쩍 넘는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노역이 좋았다.

 새벽같이 인덕원역 부근 인력사무소에 간다. 낡은 소파에 앉아 일찌감치 출근한 경리 언니에게 농담을 건넨다. 난 버려야 마땅한 너절한 운동복을 입고 온 탓에 남루한 행색이다. 어쩐지 더러워 보이는 정수기로 걸어가 능숙한 척하며 맥심 모카골드를 타서 마신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누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지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소장님이 출근한다. 그는 날 흘겨보고는 '너 몇 살이냐. 일 경험은 있냐' 질문을 던진다. 난 나도 모르는 새 가슴을 쫙 펴고 힘 좀 쓰는 청년을 자임한다. '몇 번 해봤어요. 미성년자는 아니에요' 아저씨는 날 꼼꼼히 살펴보다가 선심 쓰듯 공사장 일거리를 주신다.

 개인적으로 철거 현장보다는 아파트 신축 현장이나 주택 재건축 공사장을 선호했다. 공사장은 항상 먼지가 많지만 유독 철거 현장은 땡볕에 먼지가 자욱했다. 어느 정도 준공에 다다른 현장은 건물로 인해 그늘이 져 덜 지치고, 현장 분위기도 한결 여유롭다. 바야흐로 뉴타운과 재개발 붐이 일던 시절이었다. 개발 광풍이 온 도시를 휩쓸던 때라 나 같은 공사장 단기 알바생을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레이스 봉고차에 올라타고 현장으로 가는 차 안은 적막이 흐른다. 하염없이 긴 하루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후드티를 입은 내 나이 또래 녀석들이 여럿 보인다. 우린 주로 벽돌이랑 흙을 옮기는 일을 했다. 벽에 나사를 박는 기술자 아저씨를 보조하기도 하고, 여러 차례 트럭이 물자를 쏟고 가면 실어 나르는 일도 우리 몫이었다. 난 잠깐 쉴 때마다 공사장 한편에 마련된 정수기 옆에서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시계만 살폈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은 무조건 순대국밥이나 설렁탕을 먹으러 간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도 당이 모자라니 식당 자판기에서 달곰한 커피를 연거푸 뽑아 마신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도 종이컵을 들고 당을 주입한다. 그렇게 혈관에 당이 돌면 그동안 말 한마디 없던 아저씨들의 질문공세가 시작된다. 뉴페이스의 출현은 그들의 심심찮은 오락거리로 보였다. 아저씨들은 시시덕거리며 힘이 없어 주저앉고 싶은 날 붙들고 농담을 던졌다. 난 무시해버릴까 생각하다가도 그러다 또 힘든 일을 받으면 어쩌나 싶어 또박또박 답했다. 밥을 먹고 현장으로 돌아가면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낮잠을 청한다. 어차피 저녁은 주지 않을 테니 체력을 아껴야 한다. 공사장 주위에 널린 박스를 아무렇게나 깔고 눕는다. 그렇게 어렵사리 7시까지 버티면 두툼한 돈 봉투를 받을 수 있다. 소장 아저씨는 꼭 다른 데보다 많이 주는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생색을 낸다. 너 정도 일하는 앤 쌔고 쌨다면서도 내일 또 오라고 재촉했다.


 며칠 전 늦은 저녁까지 일하고 집에 가다가 도로 공사 현장을 바라봤다. 신호 대기 중이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 쉬고 있는 인부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들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설탕 크림이 잔뜩 들은 커피믹스일까. 난 무심코 그들의 고된 하루를 상상했다. 노동이 주는 신성한 기쁨에 대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 몸을 씻고 삼겹살에 김치를 구워 먹는 시간을 상상했다. 식탁에 앉아 오늘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을 만끽하겠지. 난 불현듯 빈 종이컵을 구기며 현장으로 돌아갈 때 느꼈던 아스라한 피로감을 떠올렸다. 그건 확신에 가까운 기쁨이라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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