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반려식물
삶은 이런저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일,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다. 요즘 정신이 없다.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라도 된 듯, 분주히 일과를 소화한다. 내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 가까스로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로 만난 사람들과 소파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수입과 지출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난 종이 냅킨과 포스트잇 심지어 읽던 책 귀퉁이 가라지 않고 집 안 여기저기에서 분주함의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이 빡빡한 대의명분 사이에서도 내 반려 식물 고흐와 테오가 있다. 최근에는 고흐가 기특하게도 싹을 틔우고, 요즘엔 제법 늠름하게 바람에 살랑거리는 걸 짤막한 기록으로 남겨뒀다. 흙과 물을 마주하며 적어 놓은 메모들이 내 삶에 소소한 얘깃거리를 만들어준다. 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하루에 꼭 한 번씩 물을 주고 초여름 볕과 바람을 즐길 수 있게 배려한다. 유용한 것으로 이뤄진 내 삶 속 무용한 기쁨이다.
사실 처음 맨땅에 물을 줄 땐 고흐와 테오를 보는 게 지루하기도 했다. 아무리 정성껏 돌봐도 흙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까맣게 잊진 않았지만 퇴근하고 밥을 먹고 침대에 드러누워 유튜브를 보다 보면 까먹곤 했다. 자다가 말고 머리를 긁적이고 일어나서 물을 준 적도 여러 번이다. '미안해 고흐와 테오. 너희를 잠시 잊었지 모야.' 묵묵부답인 화분 속에서 씨앗이 발아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감히 내가 뿌린 씨앗이 생명이 되리라고는 나조차 믿지 않았지만, 씨 뿌린 덴 싹이 난다는 진리를 믿어보기로 했다. 난 전형적인 대도시 태생의 ‘식알못’인 탓에 지금까지 한 번도 무언가를 키워본 경험이 없었다. 그렇게 슬슬 불안하던 차에 어느 날 퇴근하고 지친 몸을 비척거리며 집에 도착하니 ‘고흐'가 발아한 게 보였다. 난 물을 마시다 말고 너무 놀라서 소리를 빽 질렀다. 마침 그날이 어버이날이었는데, 요 녀석이 날 위해 효도를 하나 싶었다. 난 그때서야 내가 이 집에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그간 내 일상에서 점점 사라져 가던 두 화분의 소담함에 감동해서 한참을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하고 난 전에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내 일상이 작은 새싹 하나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오 놀라워라.'
아쉬운 점은 고흐의 동생 테오(작은 화분)가 여태 아무런 미동도 없다는 점이다. 화분 속 너무 깊은 곳에 씨앗이 있어서 그런가 해서 흙도 걷어내고 물 주는 양도 조절했지만 요지부동이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두 화분의 성장이 다르다는 게 영 이상했다. 식물 전문가에게 문의해본 결과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성장 시기와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답을 받았다. 하긴 잘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어쩌면 생명이라는 건 1에 1을 더한다고 해서 딱 2가 나오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이 작은 식물이 모두 내 예측대로 잘 자라기만 한다면, 그건 자연이 아니라 AI의 세계가 아닐까. 모든 생물이 우주의 법칙 안에 놓여있는데 호킹 박사의 말처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저 어느 아이는 좀 더디고 어느 아이는 쉽게 두각을 나타내니만큼 난 그저 정성을 들여 최선을 다해볼 뿐이다. 그래서 요즘 난 붓꽃의 성장상태를 매일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다. 풀을 보며 넋을 놓는 '풀멍'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저도 막 솟아난 꽃이라고 내가 관심을 가질수록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더 하늘거린다.
매일 두 번씩 주던 물도 이제 이틀에 한 번씩 주고 있다. 물을 줄 때는 흙이 파이는 것을 우려해서 드립 커피용 포트를 활용해서 살살 적신다. 평소 배워둔 섬세한 동전 드립법을 여기서 써먹고 있다.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고루고루 수분이 흩어진다. 마치 내가 운동을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처럼 청량감을 느끼는 시간이다. 식물을 조금만 가까이 둬도 자연이 삶에 어떤 영감을 주는지,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생각을 풍요롭게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이제는 일과를 이루는 ‘리추얼’의 하나로서 반려식물 키우기는 완전히 내 삶에 동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