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정이 꺼지고, 깜깜한 화면 안으로 멍한 얼굴이 들어찼다. 창문 너머로 점심시간을 즐기는 직장인들의 웃음소리, 개가 왕왕 짖고 자동차 경적이 울리는 한낮의 소음들이 부단히 섞여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까부터 한숨만 푹푹 쉬구.”
지우가 파티션 너머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점심 드시러 안가세요?”
“우리 동갑인데 너무 극존칭 쓰는 거 아녜요?”
지우가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나는 가까스로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그는 알까? 구획을 나눈 이 단단한 파티션처럼, 우리 사이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정규직과 계약직. 안정과 불안정. 그 힘 빠지는 사실이 우리 사이를 친구가 될 수 없게 만든다는 걸. 나는 발끝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기 혐오감을 익숙하게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그러는 해강씨는 점심 안 먹어요? 아까 팀원들 다 같이 나가던데.”
“저는 아까 도시락 싸와서 먹었거든요.”
“오, 부지런하다.”
“남은 거 싸온 건데요, 뭐.”
“난 아까 우리 팀장이 또 헛소리해서 밥맛이 뚝 떨어졌다니까요? 재수 없는 인간. 암튼 우리 커피라도 마시러 가요. 내가 쏜다!”
지우는 말릴 새도 없이 나를 질질 끌고 사무실 밖을 나섰다. 나는 쉴 새 없이 떠드는 지우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다가 잡혀 있던 팔짱을 조심스레 풀었다.
‘요 앞에 신상 카페 생긴 거 알아요? 사장님 보러 간다고 직원들이 엄청 호들갑이던데. 궁금하죠? 거기 가볼래?’ 존댓말과 반말을 넘나드는 지우의 화법에 조금 웃음이 났다. 대출금 잔액 7천 8백 53만원. 조금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지우가 씩씩하게 인사하며 카페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맑은 풍경 소리가 들리고, 필기체로 멋스럽게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 테이아. 한낮의 소음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듯 한순간에 사라지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한 쪽 벽면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어 명도가 낮은 공간을 차분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감탄사를 내뱉는 지우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공간을 훑었다. 테이블 위로 자리한 노란 밀랍 초들과 입이 닿을 듯 격정적인 포옹을 나누는 연인이 그려진 흑백 영화 포스터. 책장에는 낯선 언어로 적힌 오래된 도서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가만가만 책장을 쓸어 보다가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가 눈에 띄는 남자였다.
“인근 직장인은 할인 되죠? 명함 보여드리면 되나요?”
친근하게 쏟아 내는 지우의 말에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강씨도 와서 명함 보여드려요. 10% 할인된대!”
“아, 지금은 명함이 없는데….”
지갑을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뿔테 안경 너머 남자의 눈이 얼마간 흔들렸다. 착각인가.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피했다. 무더운 햇살 탓인지 뒤늦게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사장님 어쩌죠? 이 친구는 명함을 안 가져 왔대요.”
“……”
“사장님?”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제 친구가 명함을 놓고 왔대요.”
“동료분일 테니 할인해 드릴게요.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요. 해강씨는?”
어느 아름다운 마을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에 얼마쯤 시선을 두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순한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저희 가게, 초콜릿 라테 맛있는데 드셔보세요. 좋아하실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카페를 나서자 한낮의 소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뜨거운 아스팔트를 쿵쿵 울리는 자동차 엔진과 사람들의 말소리. 익숙한 소란스러움, 그리고 낯선 향기. 차가운 물이 몽글몽글 맺힌 플라스틱 컵 너머로 진한 초콜릿 향이 전해졌다.
“사장님 진짜 친절하지 않아요? 서비스도 잔뜩 챙겨주고. 근데 이렇게 퍼주면 남는 게 있나?”
문득 커다란 쇼핑백을 쥐어주며 어딘가 들뜬 듯이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살짝 스쳤던 손끝.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던 입술. 물끄러미 쇼핑백을 들여다보았다. 온갖 디저트들이 들어 있었다. 바닐라 휘낭시에, 초콜릿 쿠키, 스콘과 유자잼, 블루베리 마카롱. 나는 지우 몰래 되뇌어 본다. 테이아, 테이아, 테이아. 참았던 숨을 몰아내듯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뜻하지 않은 디저트 만찬을 즐겼다. 눈앞이 번쩍일 정도로 달디 단 초콜릿 라테를 한 모금 먹은 후 부드러운 휘낭시에를 크게 베어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지우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궈내는 나를 보며 입이 떡 벌어졌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우씨, 나도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 때문인지, 불안한 내 미래 때문인지, 근심 없이 맑은 지우씨가 부러워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기억 속 어딘가를 헤집고 들어오는 너무나 달콤한 디저트 때문인지.
저도 제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