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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클리어워터 레이크(1)

  연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릎을 굽혀 땅을 만져보니 버석버석한 모래가 만져졌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지평선 끝까지 살아 있는 것이라곤 몇 그루의 가시덤불과 잎이 없는 나무뿐이었다. 렌의 동굴에서 도망친 후로,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긴 시간 동안 이 곳을 찾아 헤맸다. 클리어워터 레이크. 그 이름과는 다르게 황폐한 땅 위에 세워진 마을. 먼 과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푸르렀던, 신이 사랑했던 지상낙원. 하지만 이 땅에는 작은 생명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연우는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래 알갱이를 털어내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 폭풍이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물을 먹지 못해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날카로운 알갱이가 그의 여린 살을 마구 할퀴었으나,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 완벽하게 아물었다. 그는 익숙한 듯 뺨을 쓸었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천을 더 단단하게 동여매려는 순간, 폭풍 너머로 둥그런 형체가 보였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알 수 없는 그것을 등대 삼아 발걸음을 떼었다.


  간신히 폭풍을 넘어서니 거짓말처럼 고요가 찾아왔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엎드린 채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어 언뜻 보면 땅에 박혀 있는 돌멩이 같았다. 연우는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천 조각을 조악하게 이어붙인 옷이 너덜너덜했다. 그의 마른 등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살아 있다. 강렬한 햇빛과 반짝이는 모래가 교차하면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봐요.”


  그의 등을 살짝 두드리자 거친 신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갈라진 땅바닥을 움켜쥐고 있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입술이 달싹이자 연우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앳된 얼굴이었다.


  “뭐라고요?”

  “무시하고 그냥… 가요.”


  아이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서,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정신을 잃자, 연우는 허리춤에 찬 물통을 아이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나 나오는 건 몇 방울뿐이었다. 아이의 몸이 너무 뜨거워 급한 대로 마법을 쓰려는 찰나, 아주 먼 곳에서부터 메아리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해강! 주해강!’


  연우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머리 위로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아지랑이 너머 희미한 인영이 멈칫하더니, 점점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회색 눈동자를 지닌 이가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이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이보다 체격이 훨씬 다부지긴 했지만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연우는 아이의 몸을 들어올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가벼웠다.


  “찾는 사람이 맞나요?”


  회색 눈동자가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손을 뻗었다. 연우가 엉거주춤 다가가자, 그가 잠시 손을 휘적거리더니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주 느리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해강이 맞군요.” 

  “…당신들, 혹시 클리어워터 레이크에서 왔나요?”


  회색 눈동자가 안도의 미소를 지워내고 연우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수레바퀴가 덜컹이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의 무릎에 기대 쓰러질 듯 잠든 아이의 갈색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회색 눈동자는 말을 몇 번 토닥이더니 방향을 틀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정표 하나 없는 황폐한 땅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시간이 지나자 허물어 가는 목조집이 하나둘씩 나타나더니, 이윽고 숨겨진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일행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레가 멈췄다. 마을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솟은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짙은 어둠에 잠긴 저택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맹수처럼 보였다. 회색 눈동자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곤 저택의 뒷문으로 그림자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연우는 문득 손을 간질이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어느새 눈을 뜨고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강렬한 통증이 느껴져 그의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지구의 궤도에 들어선 소행성이 산산이 부서지자, 멈춰 있던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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