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보였다. 여기는 어디지? 그 저택인가? 창문 너머로 창백한 새벽달이 떠 있었다. 조각나듯 끊긴 기억. 황무지 한 가운데에 버려진 아이와 구원처럼 나타난 회색 눈동자. 원망스러운 아이의 표정과 뺨을 두드리던 온기. 그리고 온몸이 녹아내릴 듯 고통스러웠던 충돌, 그리고 해방감.
문득 연우는 곁에서 느껴지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여전히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침대 가에 옹송그리고 엎드려 있었다. 황무지에서 죽어가던 표정과 다르게 가지런히 닫힌 두 눈이 평화로워 보였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연우는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목마름에 마른기침을 토했다. 그러자 아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이가 발꿈치를 들고 조용히 문가로 다가섰다. 연우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문이 활짝 열리더니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이가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놀란 연우가 몸을 뒤로 빼며 침대 헤드에 머리를 부딪쳤다. 두 사람은 신음을 흘리는 연우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소곤대기 시작했다.
“너 정말 죽으려고 했어?”
“…산이 그래?”
“지금 그게 중요해?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다며. 우리가 얼마나 널 찾아다녔는데. 꼴이 이게 뭐야…”
재윤이 해강의 얼굴을 감싸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뭐라 말을 이어가려던 재윤이 해강의 굳은 얼굴에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연우가 다시 한 번 기침을 토해냈다.
“…재윤아, 주방에 다녀올게. 잠시만 여기 있어줘.”
곧 해강이 사라지자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연우는 힐끔대며 재윤을 바라봤다. 그 역시 해강과 마찬가지로 헤진 차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허름한 행색은 광이 날 정도로 반짝이는 이 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여긴 어디입니까?”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박의 저택이요.”
“그가 이 저택의 주인이군요. 뭘 하는 자입니까?”
“클리어워터 레이크에서 제일 유명한 사기꾼… 아니, 마술사인데. 몰라요?”
재윤이 의뭉스럽다는 듯 연우를 노려보자, 연우가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해강이 방으로 돌아왔다. 해강이 연우에게 물병을 건네자, 연우는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해강은 찻물을 들이키는 연우의 목울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물방울을 훔치는 그의 입술에 혈색이 돌자 안도감과 동시에 절망감이 들었다. 결국은 제자리였다. 자신은 또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재윤이 자신을 툭툭 건드렸지만 도저히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은 나오질 않았다.
“…당신은 누구죠? 이 마을에는 오랫동안 외지인이 오지 않았어요. 숨겨진 곳이니까요. 설사 이곳을 안다고 해도 황무지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짧은 새벽이 지나가고 뜨거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해강은 생각에 잠긴 연우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지저분한 행색을 보아하니 오랫동안 떠돈 처지인 듯한데, 그에 반해 걸치고 있는 옷과 장신구는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이 수상한 외부인의 창백한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말끔했다. 황폐한 땅의 날카로운 모래 바람을 정면으로 헤치며 이곳을 찾았다는 것인데, 작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차가운 동생의 몸을 멀쩡한 비석하나 세워주지 못하고 황무지에 버려둔 채 저택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해강은 충동적으로 수레에서 뛰어 내려 목적지 없이 뛰고, 또 뛰었다. 지쳐 쓰러진 자신을 바람이 데려갈 때까지.
“클리어워터 레이크… 이곳이 오래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이 마을에 제가 찾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라 믿었으니까요. 저는 그저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방랑자일 뿐입니다.”
그때 문 너머에서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저택이 깨어나고 있었다. 재윤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기요, 해강을 구해준 건 고마운데, 이제 떠나야 해요. 저택의 주인이 알아차리기 전에.”
“한재윤, 지금 이 몸으로 황무지에 나가면 죽을 거야.”
“그러는 넌 왜 그랬어?”
재윤이 활짝 열려있던 창문을 닫으며 해강을 쏘아봤다.
“외부인을 들인 걸 알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산한테 얘기해서 수레를 준비해뒀으니까 어서 나가자.”
“…두 사람은 이 저택에서 뭘 합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고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 사이에 연우의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재윤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하인이에요. 마술사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하죠.”
“마술사라…”
“하, 마술사는 무슨. 다 눈속임이죠. 돈에 환장한 사기꾼이에요.”
재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저택을 울리는 박의 고함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천한 것들. 재수 없는 놈들. 저택에 붙어서 기생하는 벌레 같은 놈들.
“저는 이곳에 머물 겁니다.”
“그래요, 지금 당장 나가서… 잠깐, 뭐라고요?”
“아까 말했잖아요. 저는 오랜 시간 이곳을 찾아 헤맸어요. 여기가 제가 있을 곳이에요.”
“하, 미치겠네. 박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나본데, 그 자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놈이에요. 특히나 당신 같은 수상한 외부인이라면 더더욱!”
“걱정 마세요. 두 분에겐 피해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시간 없다고요!”
붉은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던 재윤이 그를 무작정 끌어내리려는 찰나, 해강은 코끝에 닿은 차가운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손을 뻗자 눈송이가 손끝을 간질였다. 재윤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 박이라는 사람, 결코 저를 죽이지 못할 겁니다. 가짜는 진짜를 탐내는 법이고, 마법은 돈이 되니까요.”
연우가 자조적인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해강은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 위로 부드러운 눈송이가 쌓여갔다. 연우가 턱을 괴고 그런 해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을 처음 보나요?”
“…이걸, 눈이라고 하나요?”
“제가 태어난 곳에서 이런 마법은 아무 쓸모도 없었어요. 이곳과는 완전히 다르게 하루 종일 눈이 내리는 곳이었거든요.”
“쓸모가 없다니요. 너무 아름다운걸요.”
연우는 꿈을 꾸듯 멍한 표정을 한 해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의 이마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아이는 막 잠에서 깬 동물처럼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