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피곤해서 환청이 들리는 건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끝도 없이 이어진 야근에, 주말에는 레스토랑 서빙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온몸이 쑤셨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해강아, 백반집 이모야. 할머니가 너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계단에서 내려오다 다치셨어. 한 번 안 올래?]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 안 보고 싶으실 거예요.’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 곧바로 글자를 지우고 [조만간 갈게요.] 라고 짧게 답을 보냈다. 사랑받지 못했던 인간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휴가는 언감생심이니 주말 알바를 빼야했다. 매니저에게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복잡한 마음에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커피믹스를 들추다보니 자연스레 생각은 하나로 향했다. 그 카페, 가볼까.
결국 홀로 테이아로 향했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커피는 비싸니까. 점심은 무조건 도시락을 싸왔고, 커피는 휴게실에 굴러다니는 차나 간식으로 대체하곤 했다. 다만 피곤하고 느슨한 몸에 작은 보상을 주고 싶었고… 아니, 사실 다 핑계다. 테이아를 다녀온 이후부터 그곳이 쉬지 않고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딸랑. 청명한 풍경 소리. 나는 쭈뼛거리며 문을 열었다. 카페는 어두운 골목길 가운데에서 외딴 행성처럼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원두 가는 소음도, 손님들의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커피 잔을 닦고 있는 걸 보니 마감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강아!
또다.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눈에 띄게 몸이 굳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쳤다. 정수리를 보이며 끙끙 앓는 그가 웃겨서 애써 웃음을 참았다.
“괜찮으세요?”
그가 부산스럽게 주위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돌돌 말려있던 니트 소매를 접어 내리며.
“와. 너무 반가워서 그만….”
“저 기억하세요?”
“그럼요. 언제 오려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요. 초콜릿 라테 줄까요? 아님 다른 거?”
“마감 하신 거 아녜요?”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몇 주 전에 지우와 함께 잠깐 들렀던 게 다인데,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신나 보인다. 나는 어색한 마음에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언어지? 손을 대면 바스라질 것만 같은 세월이 느껴져서 서둘러 책장을 닫았다. 곧 우유를 데우는 소리가 나고 달콤한 향이 퍼졌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섬세한 무늬 틈새로 어둠이 쏟아졌다. 얼른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슬며시 눈을 감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해강아.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널 찾아갈게.
머릿속을 희미하게 울리는 저음에 눈을 떴다. 어느새 그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기쁨과 행복에 충만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잠깐, 기쁨과 행복이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낯선 이의 눈빛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리운 감각을 느끼는 일 따위는.
“좀 더 자도 되는데. 그래도 식기 전에 마셔요.”
“…고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같이 퇴근해요.”
불 꺼진 가게를 나서며, 속수무책으로 말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왜 이 사람 퇴근을 기다리고, 같이 걷고 있는 거지? 커피 한 잔 마시러 갔을 뿐인데.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앞만 보며 빠르게 걷다가, 무언가 허전해 뒤를 돌아보니 그가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를 조금씩 절었다. 나는 발걸음을 늦췄다.
그는 의외로 말수가 많았다. 해강씨, 왜 그동안 카페 안 왔어요? 그런데 회사에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혹시 혼자 일 다 떠맡은 건 아니죠? 야근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말에 줄곧 볼멘소리를 내던 그의 음성 뒤로, 매미 울음소리가 여름밤을 채웠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저 계산 안했어요.”
“서비스예요.”
“사장님, 원래 이렇게 손님한테 다 퍼주세요?”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죠.”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렸다. 저 사람은 뭐가 그렇게 좋을까. 그리고 난 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울까. 그의 수다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걷다보니 어느새 회사 앞에 다다랐다. 붉은 담장 너머로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가 말을 멈추자 곧바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가 ‘저…’ 하고 말끝을 흐렸다.
“자주 오세요, 꼭.”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저는 신연우예요.”
도망치듯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를 신경 쓰느라 한입도 대지 못한 음료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모니터에는 당장 처리해야 할 온갖 데이터와 숫자가 떠 있었지만, 이미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는 지 오래였다. 신연우. 그의 이름을 곱씹을수록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적막하고 어두운 우주에 떠 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조그마한 빛이 보였다. 빛은 점점 몸집을 키운다. 나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빠르게 돌진하는 소행성이었다. 나는 소행성과 충돌했다. 충돌은 파괴적이었나, 간절히 기다리고 바라온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리도록 푸른 바다에 온몸을 던졌다.
그 순간 눈이 떠졌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새벽동이 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