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한 가운데는 커다란 구(球)가 눈부실 정도로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클리어워터 레이크 주민들이 숭상하는 달의 모형이었다. 그 주위로 화려한 휘장을 두른 코끼리와 재규어, 그리고 공중을 아슬아슬하게 가르는 곡예사들이 있었다. 소란은 커져만 갔다. 사람들은 마치 알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함성과 고함을 내질렀다. 경기장 전체에 붉은 연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은가?”
연우는 무대를 떠나는 해강의 뒷모습을 좇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박이었다. 그는 번쩍이는 광택이 나는 파란 정장을 입고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안전장치 하나 없이 아마추어들을 데려다가 쇼에 세우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건, 학대와 다름 없습니다.”
연우가 주먹을 꽉 쥐고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박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헤베의 표식을 보고 짐짓 빙그레 웃었다. 아아- 네 놈의 보잘 것 없는 마법이야 내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지만, 렌의 아이는 그냥 죽여서는 안 되지.
“…그거 아나? 인간이란 동물과 같아서 목죽을 쥐고 조금씩 쾌락을 맛보여 주기만 하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게 돼있지. 아이들과 짐승은 다르지 않다는 말이네. 학대라니, 섭섭하군.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거둬 먹인 게 누구인데.”
무대 가장자리로 불꽃 기둥이 솟구쳤다. 아이들은 얇은 천 하나만을 간신히 걸친 채 불꽃 위를 위험천만하게 넘나들었다. 연우는 문득, 수천 개의 촛불과 목이 잘린 닭의 몸뚱이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나의 연우. 너는 영원히 아름다울 거야. 숨을 깊게 들이 마시니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어지러웠다. 어느새 서커스는 막바지에 오르고, 붉은 머리의 곡예사가 온 몸을 활처럼 펼치며 보랏빛 하늘을 비행했다. 재윤이었다. 관중들은 해가 진 하늘을 향해 흥분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평범한 곡예나 동물 묘기는 슬슬 질려. 수입도 줄고 있고. 다음번엔 ‘진짜’ 마법을 선보일 생각이다. 신체절단마술. 나의 역작이 될 거다.”
박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흥분한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연우에게 닿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고, 함성은 마치 광기어린 비명처럼 커져만 가고 있었다. 연우는 경기장 안을 둘러봤다. 반짝이는 붉은 가스가 온 경기장을 뒤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방비하게 입을 벌리고 가스를 집어 삼켰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숨을 참았다. 왜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 익숙한 연기를. 그때, 술에 취한 것처럼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박이 휙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공포에 질린 연우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당신, 이게 뭔지 아는군.”
연우는 그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박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순간 해강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괜찮을까. 연우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자, 박이 기민한 눈동자로 그를 좇았다.
하인들의 대기실은 그들이 머무는 방처럼 비좁고 지저분했다. 경박스러운 화려함이 완전히 사라진 그곳엔, 흥분과 슬픔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아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연우는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키가 크고 마른 아이가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준아, 제발 대답 좀 해봐.”
해강의 목소리였다. 그는 두 손이 피범벅이 된 채 창백한 얼굴을 정신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재윤은 우아하게 흩어지는 황금빛 의상을 채 갈아 입지도 못한 채 준의 곁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연우가 무리에 다가서자 낯선 이의 등장에 웅성거림이 더해졌다. 준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연우는 해강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죽었어요.”
연우의 목소리에 해강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편한 곳으로 갈 수 있게 해줘요.”
연우가 해강을 손을 잡고 끌었다. 해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준의 눈을 감겼다. 어느새 퍼뜩 정신이 든 재윤이 웅성거리는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피를 닦고, 준을 깨끗한 곳에 뉘여. 우리는 마지막까지 쇼를 잘 끝내야만 해. 안 그러면 박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거야.
대기실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해강은 여전히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고장 난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준의 몸이 들리자 해강의 눈동자만 겨우 그를 좇았다. 연우는 해강의 옆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대기실이 조용해지자, 해강은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였어요. 뭐든 열심히 했죠. 박의 눈에 들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저는 빨리 죽고 싶지 않으면 최대한 눈에 띄지 말라는 한심한 조언이나 해줬죠.”
“어쩌다가 저렇게 됐습니까?”
“줄이 끊어져 추락했어요.”
해강은 묘한 흥분으로 들뜬 준의 표정과, 곧이어 손 써볼 새도 없이 낙하하던 장면을 되감고, 또 되감는다. 그의 죽음은 화려한 불꽃에 가려진 채,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다. ‘달에게 신성한 제물을 바쳤으니, 신도 용서하실 거다. 시신은 황무지에 버려.’ 박은 생명이 스러져 갈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일을 눈엣가시인 자신에게 일부러 시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해강이 분노와 슬픔에 못 이겨 눈물을 떨궈냈다.
“제가 살던 고향에도 어린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연우의 목소리에 해강이 그를 바라봤다. 그는 핏자국이 눌러 붙은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명씩 사라졌어요. 죽었을까? 아님 버려졌을까? 잘 모르겠어요. 저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제 시간은 멈췄죠. 어쩌면 답을 찾기 위해, 아니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들을 위해 여태껏 버텨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해강씨도 그렇지 않나요?”
핏자국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대기실 창 너머로 달빛이 비춰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