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 이번 서커스에서도 관객들의 주머니를 몽땅 털어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다. 값비싼 술과 약이 넘쳐났고, 흥분한 관중들이 주먹다짐을 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혹독한 매질이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니까, 그 붉은 연기가 뭐라고요?”
앞서 걷던 재윤이 뒤를 돌아 연우를 보며 속삭였다. 세 사람이 일제히 연우를 돌아봤다.
“환각 연기. 조금이라도 들이마시면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중독된다면 기절하거나 환청을 듣기도 합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우리 모두가 그 연기에 중독돼 있었던 거네요. 어쩐지 서커스를 할 때면 항상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었는데. 다들 그토록 두려워하다가도, 쇼만 시작되면 겁도 없이 몸을 던졌잖아.”
재윤이 지난날을 곰곰이 곱씹으며 대답했다. 해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던 붉은 연기. 안전장치 하나 없이도 망설임 없이 허공을 가르던 여린 몸들. 해강은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연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하네. 대체 정체가 뭐야?”
연우는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그야 렌이 주술 의식에서 쓰던 수법과 똑같으니까. 어두운 방과 수천 개의 촛불, 그리고 붉은 연기. 온몸을 감싸던 열기와 흥분감.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널 해치지 못하게 할게. 너의 젊음은 영원히 나의 것이니까. 연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해강과 재윤은 입을 다물었다.
재윤이 발걸음을 멈췄다. 저택과 경기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낡고 오래된 헛간이었다.
“여기예요.”
연우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재윤이 빙그레 웃었다.
“산. 가져왔지?”
조용히 세 사람을 따르던 산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가 더듬거리며 그것을 연우에게 내밀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오돌토돌한 감촉이 느껴졌다. 씨앗이었다.
“마술사의 눈을 피해서 하고 있다는 게…”
“맞아요. 우리는 나무를 심고 있어요.”
네 사람이 헛간에 들어섰다. 서커스에 동원되었던 코끼리와 재규어뿐만 아니라 온갖 야생 동물들이 거대한 족쇄에 묶인 채 우리에 갇혀 있었다. 땅은 마찬가지로 황폐했으나, 이곳저곳 둥그런 구덩이가 파여 있고 막 자라난 새싹이 나 있기도 했다. 죽음과 광기만이 느껴지던 저택과는 완전히 다른, 유일하게 생명과 활기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고 있어요. 산이 시장에서 구해온 씨앗의 대부분은 죽었지만, 용케 뿌리를 내린 것도 있거든요.”
“…클리어워터 레이크는 처음부터 황무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맞아요. 이제는 누구도 그 전설을 믿지 않지만.”
“씨앗은 어떻게 구한 겁니까? 쉽지 않았을 텐데.”
“주인은 산이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천치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산보다 황무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마 시장에 갈 때마다 이것저것 구해오는 건 꿈에도 모를 걸요.”
그때 산이 달이 뜬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재윤, 서둘러야 해. 곧 저택의 주인이 깨어날 시간이야.”
“좋아. 산, 저번에 심어뒀던 나무쪽으로 가보자. 영 상태가 안 좋아서. 두 사람은 마저 씨앗을 심어줘. 그리고, 화해도 좀 하고.”
해강과 연우가 동시에 재윤을 바라봤다. 재윤은 곧바로 산의 팔을 이끌고 헛간 뒤편으로 사라졌다. 재규어의 그르릉대는 잠꼬대가 들려왔다. 해강이 달빛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익숙하게 구덩이를 파내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를 힐끔거리며 그대로 따라했다.
서커스 이후로 괜히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해강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연우가 서둘러 맑은 물이 찰랑이는 양동이를 건네주었다. 해강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연우의 온몸에 모래와 흙이 묻어있었다. 평생 고생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사람인데. 연우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었다.
“그런데, 이 일은 왜 하는 거죠?”
해강은 막 잠에서 깬 말의 갈퀴를 쓰다듬고 있었다. 연우의 물음에 해강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어느 날 산이 씨앗을 가져왔는데 새싹이 돋아났어요. 신기했죠. 저택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발견한 생명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이곳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봐 왔는지도 몰라요. 그때부터 재윤과 새벽마다 몰래 빠져나왔어요. 처음에는 정말 무서웠는데, 그래도 헛간에 오면 조금 숨통이 트여요.”
“해강씨도 오래된 전설을 믿나요?”
“글쎄요. 이제는 엄마의 얼굴도, 목소리도 희미하지만, 그 이야기만은 또렷이 기억나요. 해강아, 원래 이곳은 꽃향기가 가득한 낙원이었단다… 그런 날이 정말 올까요?”
연우가 해강을 바라봤다. 몽상에 잠긴 표정이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죽은 사람들 곁에 나무를 심어주고 싶어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들을 위해 버텨왔던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해강은 입술을 달싹이다 연우를 향해 물었다.
“당신 이야기도 해 줄 수 있나요?”
연우는 준의 시신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18살의 어느 날에 영원히 갇힌 자신, 그리고 타인의 죽음. 죽음… 수십 년 동안 수없이 목격한 것이자, 이제는 무감각 해져버린 단어. 병들고, 늙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수많은 사람들. 이 아이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그때 옆쪽 우리에서 나무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해강이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이 온순하게 커다란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가자. 해가 떠오르고 있어.”
뒷문에서 나타난 재윤이 흙이 묻은 손을 털어내며 창밖을 가리켰다. 해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대다, 곧 세 사람을 따라 헛간을 빠져 나갔다. 그때 건초더미에서 사람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놀란 말이 뒷발질을 해댔다. 그는 숨이 막히는지 컥컥대며 숨을 토해내더니, 비틀거리며 헛간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