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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클리어워터 레이크(9)

 살아 있다는 지독한 감각. 연우는 눈을 번쩍 떴다. 무릎이 꿇린 채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고, 두 손은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머리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곳은 어디지?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붉은 연기. 서커스 경기장이었다. 그때 경기장 한 가운데로 번쩍이는 정장을 입은 박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는 양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친애하는 클리어워터 레이크 주민 여러분! 서커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관중들의 커다란 함성 소리가 온 경기장을 메웠다.


  “오늘은 특별히 저택의 주인인 제가 직접 마법을 선보이겠습니다.”


  관중들이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해가 진 하늘 아래, 달을 닮은 거대한 구(球)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이름하야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절단마술. 어디에서도 선보인 적 없는 매혹적인 마술이죠!”


  박이 제단위로 올라가 붉은 천을 거둬내자, 투명한 상자가 보였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온 몸을 일자로 곧게 뻗은 채 힘없이 누워있었다. 해강이었다. 눈물 자국으로 엉망인 살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 위로 날카로운 세 개의 톱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우는 해강을 발견하고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시끌벅적한 음악과 함성에 번번이 묻혀 버렸다. 


  “그럼, 시작합니다!”


  박이 신호하자 첫 번째 칼날이 다리 부근에 쿵 떨어졌다. 해강은 눈을 크게 뜨며 움찔했지만, 비좁은 상자 안에서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박이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톱을 들어 탁탁 썰어 내리자 상자가 그대로 분리됐다. 관중들은 몸서리를 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박의 하인이자 조수들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연우는 상자 아래쪽에 동그란 물체가 대롱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가짜 머리였다. ‘저 자는 이 자리에서 해강을 살해할 것이다.’ 연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붉은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낯설지 않은 열기와 흥분이 온몸을 잠식했다. 연우는 눈을 뜨고 태양을 감춘 하늘을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실핏줄이 터지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은 허리를 잘라 볼까요?”


  마술사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이서 두 번째 칼날이 떨어졌다.


  한편, 관중석 제일 높은 곳에 앉아 있던 작은 아이는 흥미를 잃은 채 부모를 바라봤다. 그들은 박수를 치고 고함을 지르느라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이는 문득 정수리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하얀 새? 아이는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나풀거리던 물체는 점점 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향해 돌진했다. 


  “여전히 벌레처럼 꿈틀거리네요! 과연 목이 잘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럼 지금부터 셋을 세겠습니다. 하나, 둘…”


  박이 셋을 세려던 찰나, 관중석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 아니, 얼음이었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 했다. 수백 수천 개의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박이 휙 고개를 틀었다. 제단 아래 있던 연우가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박은 곧바로 연우에게 달려들었으나, 얼음이 녹아 미끄러운 제단에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연우는 빈틈없이 묶여있던 손목이 헐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등 뒤에서 재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해강을 구해줘요.”


  연우는 재갈을 뜯어내며 제단을 향해 뛰어 올랐다. 낙하물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온 경기장을 울리고 있었다. 연우가 상자를 열었다. 눈이 마주친 해강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얼굴이…”


  해강이 팔을 뻗어 연우의 뺨에 흘러내린 피를 닦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해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가 그를 일으켰다. 그때 박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얼음에 긁혀 피칠갑을 하고서도, 박은 괴수처럼 울분을 터뜨렸다. 


  “감히 내 쇼를 망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네 놈 둘 다 당장 죽여버리겠…”


  박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재윤이 허리에 둘렀던 곡예용 천을 풀어 마술사의 목을 휘감아 졸랐다. 그가 꽥꽥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천한 것 주제에, 이거 당장 안 놔?”

  “당신이 지금까지 고문하고 죽였던 사람들이 내리는 벌이다.” 


  이윽고 박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해강과 연우, 재윤은 아수라장이 된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모두가 사라진 원형 경기장. 오직 새하얀 눈만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뜬 박이 제단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나의 저택, 내가 일궈냈던 모든 것들! 난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순 없는 거야. 그때, 마지막 칼날을 지탱하고 있던 밧줄이 힘을 잃고 풀어졌다. 날카로운 칼날이 박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것이 마법사의 최후였다.


  세 사람은 경기장을 빠져나와 저택의 끝을 향해 걸었다. 연우의 어깨에 기대어 절뚝이며 걷던 해강은 우뚝 멈춰 섰다. 희미하지만 타는 냄새가 났다. 저 멀리서 헛간이 불길에 휩싸인 채 스러지고 있었다. 동물들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우가 그의 손을 잡아끌자, 해강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무너진 울타리가 보였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저택을 벗어나 도망치고 있었다. 여기를 넘어서면, 황무지였다. 그때 재윤이 해강의 등을 밀었다.


  “둘이 가.”


  해강이 고개를 저으며 재윤의 손을 잡았다. 떨어지는 걸 단 한 순간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재윤이 해강의 귀에 속삭였다.


  “저 사람을 좋아하지?” 


  해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재윤이 짐짓 환하게 웃으며 해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여기에 남을 거야. 산이 아직 저택에 있어. 우리가 함께 심은 나무도.”

  “재윤아.”

  “주해강, 멀리 떠나서 행복하게 살아. 끔찍했던 기억은 다 잊고.” 


  해강이 연우를 돌아봤다. 황폐한 땅 위에 우뚝 서 있는 연우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보였고, 동시에 외로워 보였다. 


  “미안해.”


  미안해, 재윤아. 나는 결코 저 사람을 혼자 둘 수가 없어. 해강은 재윤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으며 연우를 향해 걸어갔다. 곧 두 사람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재윤은 하늘을 바라봤다. 어김없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문득 어깨에 온기가 느껴졌다. 산이었다. 그 역시 여기저기 긁힌 상처로 한 가득이었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난 언제나 널 찾을 수 있으니까.” 


  재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산의 몸에 기대자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재윤과 산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서커스가 펼쳐졌던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반 토막이 난 박의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재윤은 처음으로 산이 눈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초토화가 된 공간을 둘러봤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눈과 얼음을 빠른 속도로 지워내고 있었다. 


  그때, 경기장 안으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짙은 눈 화장을 하고 검은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자였다.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제단 위에 서 있던 재윤과 눈을 맞췄다. 재윤은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신연우는 어디 있지?”


  칙술루브의 주술사, 렌의 물음이 적막한 경기장을 울렸다. 날카롭고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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