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강은 연우를 둘러매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사람의 흔적이 점점 사라지더니,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황폐한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해강은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은 끝났다. 비로소 온전히 박의 저택을 벗어났다. 입술이 바짝 마르며 모래 알갱이가 씹히기 시작했다. 해강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모른 채, 힘겹게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이전엔 죽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면, 이제는 살기 위해 황무지를 건너야만 했다. 힘이 빠진 해강의 무릎이 꺾였다.
그때였다. 눈앞이 번쩍였다. 하늘 저 편에서 검은 점이 보였다. 그것은 점차 몸집을 키우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땅을 향해 낙하했다. 불길에 휩싸인 검은 돌. 예견된 충돌.
정신을 잃었던 연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해강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연우를 끌어안았다. 운석이 대지와 부딪히는 순간, 하늘이 흰 빛으로 번쩍이더니 영원과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해강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들 앞으로 두 개의 샘이 보였다. 신기루? 환상? 그는 고개를 털어냈지만 청록빛 쌍둥이 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했다.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그곳으로 기어갔다. 생명수를 마시듯 목을 축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연우였다. 그들은 이름 모를 동물의 등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었다. 단단한 두 개의 뿔이 메마른 땅을 거침없이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연우는 눈을 감은 해강의 가슴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댔다. 미약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니 너덜너덜한 천을 온몸에 휘두른 채 눈만 내놓은 유목민이 보였다. 그 역시 단단한 뿔을 지닌 짐승 위에 앉아 춤을 추듯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길을 아십니까?”
유목민은 연우의 물음에 말없이 손을 쭉 뻗었다. 지평선은 아득해보였다.
“클리어워터 레이크… 아니, 황무지가 아니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유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의 밤, 그들은 목이 잘린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수풀을 그러모아 불을 피웠다. 해강은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목민은 해강의 심장 부근에 주름진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아이는 긴 잠을 자는 거요.’ 연우가 그제야 슬몃 미소 지었다. 그렇게 황무지의 낮과 밤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혜성이 쏟아지던 새벽에 해강이 깨어났고, 두 사람은 유목민이 주는 최소한의 물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기운을 차렸다.
동물의 뼈, 부서진 집과 나무의 밑동. 드문드문 생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목민은 짐승의 뿔을 쓸더니 무어라 중얼거렸다. 어느새 황무지의 끝에 다다랐다. 연우는 유목민에게 몸에 걸치고 있던 값비싼 장신구를 내밀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토록 아름답게 내리는 눈은 아주 오랜만이었소.”
유목민은 다시 모래 바람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후에 해강과 연우는 종종 쌍둥이 샘이 정말로 실재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죽기 직전 신이 자비를 베풀어 보여준 환상이었을까? 혹은 가물어가는 의식이 만들어낸 꿈이었을까?
그렇게 1년여 간 두 사람은 여러 마을과 도시를 떠돌았다. 해강은 세상의 전부였던 마술사의 저택이 그저 새장과 다름없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거대했고, 훨씬 더 비참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웠다. 두 사람은 한 곳에 결코 오래 머물진 않았다. 이는 연우의 결정이었는데, 오랜 방랑은 그의 몸에 밴 습관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렌이었다. 겨우 그에게서 도망쳤는데 또다시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들을 찾아낼 확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테지만, 렌이 자신의 앞에 선 상상을 하면 연우는 여전히 공포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긴 시간의 여행에 지친 해강의 몸이 자주 아프기 시작하자, 연우는 고민 끝에 정착을 결심했다. 그곳이 바로 테이아, 두 사람이 가장 사랑했던 마을의 이름이다.
“연우야.”
진의 가게에 얼마나 손님이 많은지 불만을 쏟아내던 해강은, 자신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를 밉지 않게 노려보다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해강의 고른 숨소리 들으며 글을 쓰던 연우는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넌 태어난 날이 언제야?”
“그건 왜?”
“저택에 있을 때, 일 년의 하루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해야 했어. 마술사가 태어난 날이라고 했던 것 같아. 그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거든? 그런데 그렇게 특별한 날이라면, 나도 축하해주고 싶어서. 생각해보니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연우가 책을 덮었다. 해강은 흔들리는 불꽃에 가만히 손을 쬐고 있었다. 연우가 대답이 없자 해강이 대답을 재촉하듯 고개를 돌렸다.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해강은 연우의 얼굴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씁쓸하게 응시했다. 가끔 연우가 속을 알 수 없는 아득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마음이 저려왔다. 해강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축하해 주고 싶은 날이야 우리가 알아서 정하면 되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예를 들면… 가장 행복했던 날로 고르는 거야. 나는 테이아에 도착한 날로 할래.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니까.”
“나도 그 날인데.”
“같은 날로 하면 재미없잖아. 좀 진지하게 생각해봐.”
“그냥 네가 정해줘.”
연우는 생각에 잠긴 해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까치발을 들고 저택을 걷던 아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반짝임만이 청년을 감싸고 있었다.
“그럼 첫 눈이 오는 날 어때? 마법 말고, 진짜 눈. 얼음의 땅이었나.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데 연우 네가 너무 행복해 보였거든.”
타고난 기질 때문일까. 아니면 칙술루브, 차가웠던 고향이 생각나서 일까. 해강과 짧은 여행을 했던 얼음의 땅은 연우에겐 확실히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반면 해강은 그 며칠 동안 오한에 덜덜 떨어야만 했다. 뜨거운 태양에 익숙한 해강에게 겨울은 너무도 가혹했으니까.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쉽게 받아들인다고? 엄청 고민해서 말한 건데.”
“네가 하자고 하는 건 뭐든 좋으니까.”
해강의 표정이 한 순간에 풀리며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해강이 부끄럽거나 말문이 막힐 때마다 짓는 표정. 연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해강과 함께 하는 일은, 그의 사소한 습관과 행동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어떻게 웃는지, 짜증이 나거나 슬플 때면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연우는 마음속에 해강이 차곡차곡 채워질 때마다, 그 자신의 삶에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생명의 뿌리가 자라날 수 있음을 서서히 알아채기 시작했다.
해강이 연우의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 앞머리를 흩뜨리자, 연우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 잘라 줄까?”
연우는 해강에 대한 마음과 더불어, 한 가지 더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자신은 변화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다시 키가 크기 시작했고,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박의 저택에서 탈출한 날, 거울로 맞은 머리의 상처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고, 반면에 렌의 표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렌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그가 완전히 내 삶에서 물러난 것일까? 연우는 며칠 전 책을 읽다 베인 손가락의 상처를 가만히 응시했다. 꾹 누르면 금방이라도 피가 새어나올 것만 같은, 아물지 않는 진짜 상처였다.
“근데 이걸로 잘라도 될까?”
“…진심이야?”
해강이 어디서 찾았는지 잔뜩 녹슨 가위를 가져와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날을 오므릴 때마다 끼익 거리며 기괴한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진 내가 하는 건 뭐든 좋다면서.”
“이거 빼고.”
해강아, 이제는 알아. 시간이 흐른 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너와 함께 오늘을 살고, 내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평범하고 소중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