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는 뒀다 뭐해? 물건 옮길 때 쓰라니깐.”
해강이 수레에 과일을 내려놓는 동안 진이 혀를 차며 말했다. 진은 가게에서 일을 하고 싶다며 쭈뼛쭈뼛 들어서던 어느 날의 해강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비쩍 마른 아이가 힘이나 제대로 쓸까 싶었는데, 게으름 피우는 법 없이 성실하고 눈치 빠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박의 저택에서 제대로 잠도 못자고 하루 종일 청소와 서커스 연습에 시달렸던 해강에게 이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였지만, 진이 그 사실을 알리는 없었다.
“이 친구랑 가는 것보다 제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빠르던데요?”
해강이 늙은 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람 나이로 치면 백 살은 훤히 넘고도 남았을 말이 해강의 손길에 유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진이 그 모습을 보며 얼씨구-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너 이 모습에 속으면 안 돼. 내가 좀 만질라치면 앞발부터 날아오는 놈이… 얘가 너만 보면 개 마냥 꼬리를 흔든다니까?”
“하하, 예전에 동물들을 많이 돌봤거든요. 아직도 살아 있을 진 모르겠지만…”
“네가? 무슨 일을 했기에 동물을 돌봐?”
“…와, 과일들이 엄청 싱싱하네요? 손님들이 좋아하겠다. 저 일하러 먼저 갈게요!”
재빨리 걸어가는 해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잘조잘 떠들다가도, 꼭 저렇게 옛날이야기만 나올라치면 말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곤 했다. 언젠가는 꼭 알아내리라, 진이 다짐을 하는 동안 늙은 말이 멀어지는 해강을 향해 푸르릉 울어댔다.
“아이고, 허리야. 해강아, 오늘은 이만 접자. 곧 비가 오려나 보다.”
“잠시만요. 아까 손님이 찾으시던 와인이 분명 여기 어딘가 있었는데…”
과일부터 채소, 와인과 치즈까지 없는 게 없는 진의 가게는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테이아의 유일한 만물상점이자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공간. 오늘도 물건 정리하랴, 수다 들어주랴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진이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허리를 두드렸다. 해강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찬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진은 한산한 거리에 우뚝 서 있는 길쭉한 인영을 발견했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뾰족한 우산이 펼쳐졌다. 그의 몸을 감싼 긴 코트 자락이 조금씩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해강과 더불어 요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외지인이었다. ‘저 신연우라는 사람, 혹시 마법사니?’ 어느 날 해강에게 물었을 때, 해강은 그럴 리가 있냐며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상했다. 어떤 이는 짐승으로 변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그가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문은 무성히 커져만 갔고, 어린 아이들은 연우를 마주치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정작 연우는 소문에는 어떤 관심도 없다는 듯, 예의 그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로 저녁때마다 진의 가게 앞에 나타났지만.
“해강아.”
연우가 빗방울을 털어내며 가게로 들어섰다. 진은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느낌에 양 손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갑자기 비가 와서 그런가? 연우가 해강의 품에 아슬아슬하게 안긴 와인 병을 가져갔다. 그제야 해강이 연우를 발견하고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연우가 진에게 목례를 건넸다.
“앞으로 인기척 좀 내줘. 그렇게 매번 소리 없이 나타나니까 애기들이 세상 떠나가라 우는 거 아니야?”
해강을 바라볼 땐 조금 표정이 풀어지더니, 금세 차가워진 태도에 진이 장난스럽게 우는 소리를 냈다. ‘…애들이 연우만 보면 운다고요? 도대체 왜요?’ 해강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묻자, 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해강을 가게 밖으로 밀어냈다.
“그야 해강이 넌 아무 것도 모르겠지. 자, 꾸물거리지 말고 집이나 가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두 사람은 이윽고 나란히 우산을 쓰고 골목 어귀로 사라졌다. 우산의 기울기만큼 연우의 어깨가 젖어가고 있었다. 진은 질렸다는 한숨을 내뱉었다. 집에서 툭 튀어나온 배를 긁으며 하품이나 해대고 있을 웬수같은 남편이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고개를 저으며 가게 문을 닫으려던 때, 바닥에 떨어진 신문지가 보였다. 진은 빗물에 젖은 신문지를 집어 들었다.
“레이크… 폭동? 크레이터?”
진은 이마를 찌푸리며 검게 번진 글자를 읽으려 애쓰다가, 대수롭지 않게 신문지를 구겨버렸다. 곧 가게의 불이 꺼졌다.
해강이 창문 너머로 고개를 쭉 빼며 중얼거렸다. ‘왜 눈이 안 오지…’ 해강은 다락 창가에 앉아 연우가 만든 달콤한 빵을 우물거렸다. 다락은 테이아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집집마다 불을 밝힌 조명이 마치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해강은 유난히 다락을 좋아했는데, 뜨거운 태양이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에게 사계절을 지닌 테이아의 풍경은 늘 새롭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떨어지겠다.”
“이정도야 뭐. 그렇게 큰 경기장도 죽지 않고 날아다녔는데.”
“…주해강. 장난이지?”
해강이 연우의 심각한 표정에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 연우의 이마를 톡 쳤다.
“넌 가끔 날 너무 과보호 할 때가 있어. 그리고 그 표정, 연우야. 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다. 아가들이 보면 무섭겠어.”
“진이 하는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 아무래도 내가 변신술을 한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다 그 가게에서 나오는 것 같아.”
해강이 따뜻한 차를 머금으며 미소 지었다.
“진을 보면 산이 생각나. 이상하지, 분명히 너무 다른 사람인데. 진이 가끔 그런 말을 할 때가 있거든. 해강아, 곧 비가 오겠다. 날씨를 보니 내일은 눈이 오겠다. 산도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어. 산이 해가 뜬다고 하면, 정말로 곧 아침이 찾아왔었지.”
해강이 찻잔을 내려놓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해강은 남겨진 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쓸쓸한 눈빛을 했다. 연우는 그런 해강에게 언제나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혹시, 나와 함께 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는지 않는지. 해강이 다시 한 번 창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연우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숨긴 채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다 다친 다니까.”
“오늘도 다쳐서 온 게 누군데.”
해강이 연우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부쩍 자라난 긴 머리를 말끔하게 넘긴 연우의 얼굴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오늘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화분에 맞을 뻔했다나. 연우는 종종 돈을 벌기 위해 테이아를 떠났는데, 다쳐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가 억지로 마법을 쓰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연우는 익숙한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은데. 하나도 안 아파.”
“넌 정말… 자신한테 너무 무심한 것 같아.”
연우는 자신의 몸이나 그를 둘러싼 환경에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해강은 몰랐다. 연우의 뒤틀려있던 시간이 해강을 만나면서 원래의 파동을 되찾았다는 걸.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던 몸이 비로소 다치고, 깨지고, 변화할 수 있었다는 걸.
“…그런데 아까부터 눈은 왜? 내려줄까?”
해강은 알고 있었다. 연우가 자신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는 걸. 때때로 하려던 말을 멈추거나 잠든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테이아에 정착하기 전, 방랑을 하던 때였다. 한 노인이 연우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이럴 수가, 50년 전이랑 똑같네요. 당신은 신인가요?’ 그의 얼굴에 경외심이 깃들었다. 연우는 노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연우를 보며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같았다.
해강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하얀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연우와 해강이 함께 거닐던 오솔길, 진의 가게, 높은 첨탑위로… 두 사람은 창틀에 기대어 그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윽고 해강이 연우의 손을 잡았다.
“신연우,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벌써 잊었지? 첫 눈 오늘 날 축하해주기로 했었는데.”
연우는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너의 시간과 발맞춰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도록 행복해. 하지만, 네가 진실을 알고 나를 경멸하면 어쩌지? 렌이 우리를 찾아낸다면? 너는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줄까.
“…미안해.”
해강아, 이토록 초라한 말밖에 건넬 수 없는 나를 부디 용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