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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테이아(5)

  결국 신연우를 데리고 집까지 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마시고 가요.’ 케이크 상자를 내 품에 밀어 넣으며 버스를 타려는 신연우를 붙잡은 건, 역시 나였다.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멋없는 대사까지 쳐가며. 5층까지 오르는 내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울리는 게 새삼 신기했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건 처음인가. 초대라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삐리리-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그럼, 실례할게요.”


  신연우가 케이크와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집을 둘러봤다. 사진 한 장 걸어놓지 않은 작은 원룸이라 구경시켜줄 것이 딱히 없었다. 나는 어색한 마음에 부엌 찬장을 뒤적였다. 어디서 받았는지 모를 보리차 티백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설마 유통기한이 지난 건 아니겠지. 나는 이가 나간 유리컵에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숟가락이 부딪히며 달그락대는 소리만 들렸다. 얌전히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신연우의 앞에 탁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꽃다발을 힐끔 보니 어느새 시들어 있었다.


  “케이크, 직접 만든 거예요?”


  신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를 여니 아무 장식도 없는 흰색 케이크가 보였다. 생일. 생일이라. 지우가 요란한 이모티콘과 함께 축하 메시지를 보내긴 했다. 생일에 딱히 특별한 의미를 둔적이 없어서 형식적인 답만 보내고 곧바로 잊어버렸는데. 그러고 보니, 신연우도 메신저에 뜬 생일 알람을 보고 안 거겠지. 미안하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케이크까지 직접 만든 사람한테 하루 종일 어떻게 굴었더라. 그때 나는 신연우의 목덜미에 엄지 손톱만한 타투를 발견했다. 와인 잔 모양이었다.


  “…먹어봐도 돼요?”

  “그럼요. 좋아하던 걸로 만들었어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조각을 크게 떠 한입에 넣었다. 말없이 포크를 푹푹 찔러 넣는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신연우가 목울대를 꿀꺽 삼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래된 보리차, 그리고 달콤한 생크림 냄새. 이상한 조합이었다.  


  “…왜, 왜 웃어요?”

  “그냥요.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요.”


  신연우 쪽으로 케이크를 살짝 밀었지만,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어코 케이크를 한 자리에서 몽땅 먹어치웠다.


  잠깐, 저 꽃은 언제 저렇게 다시 살아난 거지? 연분홍색 꽃잎에 서리꽃이 앉아 물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신기한 마음에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신연우는 컵을 들고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해강씨.”


  그의 부름에 뒤를 돌자 그는 산처럼 쌓인 설거짓거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자 그가 갑자기 팔을 걷어붙이더니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고무장갑을 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물을 트는 소리에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설거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신연우씨가 왜요?”

  “…해강씨 생일이니까?”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물을 끄면, 그는 물을 틀었다. 몇 번 의미 없는 실랑이를 이어가다 지친 나는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음과 물기가 똑, 똑 떨어지는 소리. 싸구려 세제 냄새. 한쪽으로 기울어진 오래된 앉은뱅이 책상. 싱크대에서 꿀럭이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소리. 그때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소란스러움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는 걸. 나는 내 목소리가 물소리에 묻히길 바라며, 신연우의 등을 보며 말했다.


  “요즘 상담을 받아요.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건데, 지우씨가 소개해줬어요. 지쳐 보이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받아보라고요. 이상하게 그 시간만큼은 제 얘기를 두서없이 늘어놓게 되는데, 선생님께 요즘 꾸는 꿈 얘기를 많이 해요. 나는 당신을 닮은 사람과 황무지를 헤쳐 나가고, 엄청난 모험을 하죠. 잠에서 깨면 곧 사라질 걸 아니까 급하게 핸드폰을 켜요. 꿈을 받아 적을 땐 그렇게 의미심장할 수가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읽어보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있나 싶어요. 꿈이 보여주는 건 허무맹랑한 허상일까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이상일까요? 신연우씨. 왜 당신을 보면 마음이 울렁일까요. 나는 당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어요. 당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죠. 그런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요. 제가 궁금한 건 그게 다예요.”


  신연우는 내가 넋두리를 늘어놓는 동안에도 설거지를 멈추지 않았다. 구부러져있던 그의 등이 곧게 펴졌을 뿐. 나는 기울어진 책상에 머리를 기댔다. 물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에 빠져 들었다.


  해강아, 어김없이 첫눈은 오더라. 나는 한동안 네가 야속했어. 태어난 날 같은 거 정하지 말걸 그랬지. 네가 더 그리워지는 바람에 눈이 올 때마다 꼼짝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다 계절이 변화하고, 무더위의 한복판에서 깨달았어. 아, 오늘이 우리가 테이아에 도착했던 날이구나. 오늘이 네 생일이구나. 그렇게 수백 번의 여름을 너 없이 흘려보냈어. 지금도 종종 테이아에 가곤 해. 그곳은 이름도, 역사도, 기억도 모두 잃은 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고대의 전설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이제 그때의 우리를 기억하는 건 나밖에 남지 않은 거야.  


  나는 어깨를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겼다. 그리웠던 너른 품. 익숙한 향기. 한없이 쏟아지는 잠기운에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어느새 가슴께로 가만가만한 토닥임이 이어졌다. 잠들면 안 되는데. 그럼 당신이 또 사라질 텐데. 아주 오랜만에 어떤 꿈도 꾸지 않은 밤이었다. 나는 먼 곳에서, 하지만 또렷이 들려오는 음성을 들으며 편안한 잠에 들었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당연하게도 신연우는 없었다. 게으름이 물러난 부엌 싱크대, 그리고 밤새 반짝임을 잃지 않은 꽃잎만이 누군가가 다녀갔다는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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