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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크레이터(1)

  은조는 자신의 처지를 딱히 불쌍히 여긴 적이 없었다. 물론 박의 저택에서 일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수많은 방과 화장실을 청소해야 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서커스 연습에 동원되어 몸을 혹사해야 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은 적이 없고, 박의 심기를 거스르면 그의 분이 풀릴 때까지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저택이 아니면 선택지는 단 하나, 죽음밖에 없었으니까. 적어도 저택은 최소한의 음식과 잠자리를 보장하지 않는가? 


  박의 눈에 들어 끌려갔다온 하인들은 하루 종일 울거나, 실성하거나, 때로는 목을 매기도 했다. 은조는 그들이 한심했다. 저 같으면 어떻게든 저택의 주인의 비위를 맞춰서 금은보화를 누릴 텐데. 나약한 하인들이 우스웠다. 일부러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무리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거나 나름대로 치장을 해보기도 했지만, 자신은 평범하디 평범한 수많은 하인 중 한명 일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분했다.


  은조는 그래서 재윤이 탐탁지 않았다. 재윤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띄는 아이였다. 똑같이 헤진 옷을 입었음에도 길고 탐스러운 머리칼에선 우아함이 느껴졌고, 당당한 태도로 어린 하인들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게다가 서커스에서 언제나 피날레를 장식했다. 박이 은근히 재윤을 특별 취급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재윤은 은조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특권을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은조가 더욱 미워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재윤과 늘 붙어 다니는 해강이었다. 소란스러운 재윤과 달리 상대적으로 말수가 적은 해강은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박은 그저 심심풀이로, 혹은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하인들을 구타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해강은 긴 침묵을 깨고 박에게 덤비곤 했다. 해강은 저택에서 가장 많이 맞는 아이였고, 만신창이가 된 해강을 다독이는 건 재윤뿐이었다. 하인들은 박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해강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그런 해강이 우습고 꼴사나웠을 뿐인데, 은조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보이는 허리를, 얇은 머리칼과 톡 튀어나온 복숭아뼈를. 은조는 해강을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부정하기 위하여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미움은 몸집을 불려 증오로 번져갔다.


  은조의 시선은 언제나 해강을 좇았기에, 해강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이도 역시 은조였다. 언제나 꿈을 꾸는 듯 멍했던 해강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연우, 그 마법사가 저택에 등장한 이후부터. 신연우는 황무지에서 몇 날 며칠을 구른 사람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고 귀티가 났다. 은조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손끝이 스칠 때마다 불쾌한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똬리를 틀고 숨죽여 있던 질투심이 목 끝까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은조가 헛간에서 씨앗을 심고 나무를 가꾸는 네 사람을 본 건 우연이 아니었다. 눈이 먼 산이라는 자가 기척을 느끼고 몇 번 뒤를 돌아봤지만, 미행은 성공했다. 대단한 작당모의라도 할 줄 알았건만 고작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니. 은조는 실망했지만, 주인에게 알릴 적당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은조는 해강이 연우의 침실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은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살짝 열린 문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문틈을 향해 다가갔다. 해강이 조심스레 침대로 올라갔고, 연우의 품에 파고들었다. 곧 연우가 신음을 흘리며 그를 끌어안자 해강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조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대로 박의 서재로 달려갔다.


  하하, 제대로 맞췄군. 잘했다. 이은조라고 했나?


  주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은조는 박에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내려친 머리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와 끈적한 죽음의 냄새. 은조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려움과 동시에 묘한 희열이 몰려왔다. 헛간은 불타고 있고, 신연우가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주해강은….


  은조는 박의 명령으로 서커스의 조수로 임명되었다.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실크 블라우스는 태어나 처음 입어보는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은조는 헐렁한 바짓단을 애써 치켜 올리며 생각했다. 주해강은 어디에 있을까? 신연우가 죽어간다는 걸, 아니, 죽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말을 들은 그녀석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그 검고 고요한 눈동자가 흔들리고 요동치는 걸 보고 싶었다. 


  그 날 서커스에서, 해강은 마치 신에게 바쳐지는 재물처럼 높은 재단 위에 갇혀 있었다. 그의 위로 차례로 칼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칼날이 해강의 허리 위를 갈랐을 때, 은조는 주인의 말을 기억해 냈다. 세 번째에 그대로 쥐새끼의 머리를 잘라 버려. 어차피 관중들은 그게 진짜인지, 마술인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것이 내가 바라왔던 것인가? 은조의 심장이 정신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보드라운 감촉의 프릴 소매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서커스 장은 이미 흥분의 열기로 잠식돼 있었다. 그때, 해강이 고개를 돌렸다. 은조와 눈이 마주쳤다. 은조는 해강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은조야, 구해줘. 나 좀 살려줘.


  천천히 열리는 마른 입술은 환상이었으며, 느리게 들리는 목소리는 환각이었다. 하지만 그때서야 은조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깨달았다. 해강을 향한 욕망을.


  “…주해강?”


  곱씹고 또 곱씹어서 이제는 너의 모습이 실재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인가? 그날 서커스에서 해강에게 달려가려던 때, 하늘에서 얼음 덩어리가 내리기 시작했고 해강은 신연우와 함께 사라졌다. 3년 만이었다. 은조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죽은 줄 알았던 해강이, 다시 은조 앞에 다시 나타났다. 신연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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