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는 문지기가 서 있었다. 그는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맨 채 은조를 향해 속삭였다.
“이은조, 저 사람들 누구야? 한재윤은 알아? 허락도 없이 데려온 걸 알면 난리날거야.”
“기억 못하겠어?”
은조가 지하 터널을 밝혀주던 횃불을 꺼내 들고 해강의 얼굴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문지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해강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설마, 주해강?”
문지기가 두건을 풀어 내리자,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칼과 검고 여윈 얼굴이 드러났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해강의 얼굴이 풀어지며 반가운 기색이 돌았다. 그는 박의 저택에서 함께 일하던 하인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잘 따르던 어린 동생. 그러나 해강이 기억하는 앳되고 수줍었던 미소는 사라진 채 오직 차가운 냉소만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멈칫하는 해강을 바라보던 문지기가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 아직 살아 있었구나. 얼굴 좋은 거 보니 잘 먹고 잘 살았나봐?”
지하 터널 안으로 한기가 들어차고, 횃불이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강이 다급한 손길로 연우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우는 속이 미식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화를 삭였으나,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문지기가 두려움에 뒷걸음치며 연우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야? 방금 그건 또 뭐고?”
“두 사람, 따라와. 한재윤은 안에 있어.”
연우를 향해 날을 세우는 문지기의 등을 툭툭 두드린 은조가 터널의 깊은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강은 발걸음을 옮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문지기는 횃불을 등진 채 해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를 넘어선 증오심까지 느껴지는 눈빛으로…
“이은조.”
세 사람의 엇갈린 발소리만 들리던 터널에 해강의 음성이 울렸다. 은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해강의 목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재윤에게… 아니, 하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은조는 여러 해 동안 해강을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해왔다. 주해강이 날 기억할까? 매일 밤 너를 꿈꿨다고 고백해야 하나? 은조는 해강의 질문에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온 대답을 쏟아내듯 토해냈다. 수없이 반복해온 달콤한 상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남겨진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적 있나? 박이 죽고, 모두가 해방되었지. 처음에는 다들 기뻐했다. 하지만 너도 잘 알겠지, 하인들은 평생을 저택에서 살아온 천애고아라는 걸.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는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었어. 끔찍한 지옥이라 여겼던 저택이 사실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거야.
“하지만 폭동은…”
“네가 그랬지. 혼자 사라진 널 원망할 거라는 걸. 맞아. 우리 모두가 널 원망하고 증오해.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벌이고 도망친 너를. 한재윤이 하인들을 이끌었어. 우리에게 남은 건 생존과 증오밖에 없었고, 증오만큼 다루기 쉬운 건 없지. 하인들을 해방하라! 진정한 자유, 그리고 보상을 달라! 광장에서 외치는 그 순간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은조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사실이었다. 자유의 기쁨은 짧았고, 혼란이 찾아왔다. 하지만 하인들 모두가 사라진 해강을 미워한 건 아니었다. 무질서와 혼란을 잠재울 증오의 과녁으로 해강을 세운 건 재윤과 마녀였다. 혼돈 속에서 혐오는 너무나 손쉽게 피어나니까. 마녀에게 홀린 한재윤은 수백 명의 하인들을 끌고 클리어워터 레이크를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다 이곳, 크레이터에 정착했다. 크레이터에 어두운 주술과 마법이 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살아가던 이들의 삶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은조는 한 번 터진 말문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말을 이어갈수록 점점 창백해지는 해강의 얼굴이, 은조에게 묘한 희열과 짜릿함을 선사했기 때문에. 그때 연우의 목소리가 터널 안을 울렸다.
“어떻게 그 일이 이 아이의 책임이지? 해강은 죽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날 서커스에 눈이 내린 일도, 박이 죽게 된 것도 모두 내가 자초한 일이야.”
“하, 당신은 우리 얘기에 끼어들 자격이 없…”
“크레이터는? 무너져 가는 도시와 어두운 지하 터널이, 이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자유인가? 거리에서 약에 취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겠지.”
연우는 등 뒤로 느껴지는 온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안 그래도 재윤과 하인들을 놔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잠도 제대로 못 자던 아이인데…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해강을 가족처럼 아끼던 재윤이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그냥 놔두었을 리 없을 것이다.
지하 터널은 점점 좁아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하인들이 숨죽여 걸어 다니던 저택의 미로처럼. 세 사람 앞으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오른쪽 통로에서 타닥타닥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한 인영이 불쑥 나타나 은조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달려온 아이도 박의 저택에서 함께 일하던 하인이었다. 은조의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이는 해강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졌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가야겠는걸. 한재윤이 주해강과 단둘이 만나는 걸 원해. 뭐, 가족 같은 사이니 오붓하게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가 보지.”
“재윤씨가 우리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한재윤은 크레이터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모두가 그의 눈이자 발이니까. 아마 너희가 국경을 넘은 순간부터 알고 있었을 거야.”
“해강과 함께 가겠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의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로 돌아가던가.”
은조가 팔짱을 끼고 갈림길을 막아섰다. 그때 해강이 무언가 결심한 듯 연우를 마주 보며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
“…해강아.”
“아무래도 내가 재윤이랑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까. 이따가 다 같이 인사하자, 응?”
연우는 해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그를 끌어안았다. 해강이 두 팔을 뻗어 연우의 등을 토닥였다.
“알았어, 금방 와.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올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해강이 손을 흔들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연우는 그 말간 얼굴을 향해 마주 웃어 주며, 사라진 온기를 되찾으려는 듯 주먹을 여러 번 움켜쥐었다.
그때 반대편 통로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우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휙 몸을 돌렸다.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횃불 아래 흔들리던 커다란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흰 천으로 두 눈을 가린 남자였다.
“…산?”
“신연우, 정말 당신이군요. 한재윤에게 들었을 때만 해도 거짓말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해강이 저택을 빠져 나간 후에도 여러 번 두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죠.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우는 산의 눈동자에 넘실대던 신비로운 회색 안개를 기억했다. 비록 지금은 두 눈을 가리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산은 지팡이에 온몸을 의지한 채 미약하게 손을 떨고 있었다. 그의 몸은 중심축이 무너진 사람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산. 크레이터는 어떻게 알고 오게 된 겁니까?”
“…한재윤은 변화를 원했습니다.”
“변화요? 이곳에서요? 하지만 당신들이 클리어워터 레이크에 심던 나무들은…”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식물은 식물일 뿐입니다.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죠. 신연우씨, 당신이 아무리 물어도 저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해강은 늘 당신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총명하다고요.”
연우의 말에 산이 멈칫하더니, 떨리는 손길로 붕대를 풀었다. 언제나 평온했던 그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신연우씨.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산이 대답하지 않자, 연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해강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해강이 오는 데로 우리는 여길 떠날 거예요.”
산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연우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는 더듬거리며 연우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당신이, 좀, 도와주세요.”
산의 목소리는 떨리고, 가늘었으며,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의 회색 눈동자만은 연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재윤, 재윤을 좀 구해주세요. 주술사가 나타난 후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통로 안쪽에서부터 희미하게 타닥타닥, 불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통로 너머를 바라봤다. 저 멀리서부터 환한 빛이 서서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빛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새빨간 화염이 저 멀리서부터 몸집을 부풀리더니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두 사람에게 거세게 돌진했다. 연우는 재빨리 산을 뒤쪽으로 밀어내며 자신을 향해 내달리는 불꽃을 노려보았다. 맹수같이 달려들던 화염이 연우의 코앞에서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
연우야. 나의 아름다운 연우.
연우는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풀썩 주저앉았다. 희미해져가던 목덜미의 문양이 타는 듯이 쓰라렸다. 쓰러진 연우와 산의 앞으로 불꽃이 사그라지며 회색 잿더미가 눈처럼 흩날렸다. 주술사 렌이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고 연우와 시선을 맞췄다. 렌은 손끝으로 연우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연우는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뗐지만, 오직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결박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테라를 만났구나. 머리가 길었네. 여기저기 흠집도 생기고 말이야… 속상해라.”
렌이 연우의 눈에 닿을 듯 말 듯 흐트러진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올리며 속삭였다.
“너에게 수도 없이 말했었지. 이미 잊은 건 아니지? 시간은 덧없는 것이라고. 보통의 인간에게 아름다움은 너무나 짧아. 하지만 신연우, 넌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단다. 난 영원한 아름다움을 물려준 너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고, 너는 내가 창조한 우주 속을 떠도는 존재니까.”
렌의 두 팔이 천천히 연우를 옭아맸다.
“다시 영원 속으로 돌아가게 해줄게. 이제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렴.”
연우의 두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을 덮쳤다. 불꽃 기둥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