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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크레이터(4)

  해강은 연우가 작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에 담았다. 은조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해강의 팔을 붙잡더니, 한숨을 쉬며 터널의 끝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일정하게 울리던 은조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온전히 혼자가 되자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달한 지하의 끝. 그곳에는 비좁은 지하 터널 안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대한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백 개의 키가 다른 촛대가 공간을 둘러싸고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자들의 사진 위로 끈적이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동굴 한 가운데에는 불의 재단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곳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한 사람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재윤아.”


  재윤이 뒤를 돌아보더니 해강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재윤이 벌떡 일어나더니 해강을 꽉 끌어안았다.


  “해강아, 정말 보고 싶었어.”


  재윤의 몸에서 식물이 타는 체취가 났다. 오래 전 그날이 재생되며, 저택의 헛간이 불타던 장면이 떠올랐다… 해강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재윤을 향해 애써 미소 지었다. 그때 해강의 옆으로 검은 물체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빠르게 동굴을 빠져 나갔는데, 너덜너덜한 누더기 아래로 앙상한 발목이 보였다. 기이할 정도로 등을 구부린 사람이었다. 해강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재윤이 말했다.


  “아, 신경 쓰지 마. 크레이터 원주민들이야. 심부름꾼이기도 하고. 네가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내게 달려왔지.”  


  이윽고 재윤이 손가락을 튕기자 어둠속에 잠겨 있던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동굴을 빠져 나갔다. 마치 거대한 벌레가 달아나는 것 같았다. 재윤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불의 재단 앞에 덩그러니 놓인 황금빛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았다. 해강은 그제야 재윤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불꽃을 닮은 머리칼은 여전했지만, 눈동자는 검게 가라앉았으며 미소는 부자연스러웠다. 


  “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심부름꾼이 낯선 자들이 크레이터에 왔다고 보고했어. 한 명은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를 지녔대. 바로 알아차렸지. 아, 해강이 나를 보러 왔구나. 솔직히 놀랐어.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거든. 사막은 모든 걸 집어삼켜 버리잖아.”

  “재윤아.”

  “그런데 렌이 그러더라. 살아 있을 거라고. 언젠가 테라가, 주해강이 신연우와 함께 이곳을 찾아올 거라고… 역시 렌이 맞았던 거야.”


  재윤은 마치 나사가 빠진 로봇처럼 허공을 보며 두서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재윤은 언제 어디서나 주위를 환히 밝혀주는 불빛같은 사람이었다. 해강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자신이 사랑하던 친구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강은 재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두 손을 잡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고향을 떠나온 뒤로 매일 고민했어. 그 날 너를 설득해서 함께 도망쳤어야 했을까? 아니면 너와 함께 남아야 했을까? 하지만 연우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비겁하게 나는 네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넌 강하고 멋진 사람이니까. 재윤아, 미안해. 널 더 빨리 찾아왔어야 했는데.”


  재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해강이 재윤의 얼굴 위로 흐른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밖에 연우가 기다리고 있어. 뭔가 잘못됐다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

  “내가 왜 신연우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해?”


  재윤이 해강의 손을 뿌리치고 동굴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안 되는 인연이었어. 그 사람은 네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괴물이라고! 주해강, 네가 자신의 테라라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고.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괴물이라니. 테라는 또 뭐고…”


  해강은 갈 곳을 잃은 자신의 텅 빈 두 손을 바라보았다. 크레이터에 도착한 순간부터, 마음을 다해 그리워하던 이들 모두가 해강의 손을 밀쳐내고, 또 밀쳐내고 있었다. 재윤은 해강의 멍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재윤의 음성 위로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이 거칠게 겹쳐졌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재윤이 불꽃이 타오르는 재단 앞에 두 발을 딛자, 옅은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신연우와 함께 지내면서 한 번도 의심했던 적이 없어?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낌새는? 주해강, 스스로를 속이지 마. 설마 신연우가 정말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신연우가 너 같은 사람을 사랑하겠어? 너 따위를?


  해강은 천천히 재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 틀림없었다. 해강이 아는 재윤이라면, 그런 아픈 말들 따위 결코 하지 않을 테니까. 해강은 재윤을 살포시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재윤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작고, 메말라 있었다. 남들에게 내색하지도 못하고 서커스 대기실 한쪽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던 어린 소녀가 떠올랐다. 해강이 손을 내밀면, 재윤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떨림이 잦아들었었다. 해강은 동굴에 들어선 직후부터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었지만, 그리운 품을 안으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연우가 나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 사람의 눈빛은… 진짜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재윤아, 우리 여기서 나가자. 함께 테이아에 가자. 그곳은 박의 저택이나 크레이터와는 달라. 봄에는 꽃이 피고, 겨울에는 눈이 오는 아름다운 곳이야.”


  재윤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그의 동공에 보랏빛 파도가 넘실댔다. 해강의 등 뒤로 검은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부드러운 천이 거친 땅바닥을 스칠 때마다 바람 소리가 났다. 재윤이 해강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해. 나 용서하지 마.


  해강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시야가 점차 흐려지더니, 이윽고 재윤에게 기대듯이 쓰러졌다. 해강의 온몸에서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재윤이 해강을 끌어안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렌, 테라를 잡았어요.” 


  재윤의 머리 위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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