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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칙술루브

  나의 아름다운 아이, 연우야. 저 멀리, 상상조차 할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사막 한 가운데에 클리어워터 레이크라는 곳이 있단다. 먼 옛날 그곳은 숲이 울창한 신의 땅이었다. 지금은 신조차 버린 황폐한 땅이지만 말이야. 그곳에 네 테라가 있다. 이름 없는 행성들은 테라를 갈망하지. 수없는 운석이 테라를 향해 기꺼이 몸을 던지지만, 대기에 부딪혀 불타 없어지는 유성이 대부분이야. 그런데, 가끔은 아주 작은 크기의 소행성이 테라와 만나면서 큰 폭발을 일으키고 아주 선명한 상흔을 남기지. 궤도를 떠돌던 소행성이 테라의 대기를 통과하고, 지각을 강타하여 크고 확실한 증거를 남기는 거야.


  테라를 만나면 넌 부서질 거다. 산산조각이 날 거고, 고통스러울 거야. 네 아름다움은 사라지겠지. 네 젊음도 찰나에 불과할거야. 너도 그걸 원하진 않을 거야. 넌 나를 기쁘게 하고, 그게 바로 네가 원하는 바니까. 


  나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어른들의 표정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 손쉽게 분노하고 기뻐하며, 자주 슬퍼했다. 오히려 감정을 숨기는 건 나였다.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애정을 갈구한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그들이 나를 사랑스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내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사랑하는 척 꾸며낼 수도 있다는 걸.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칙술루브는 1년 내내 눈이 오는 곳이다. 어떤 이들은 칙술루브가 세상의 끝이라 했다. 모든 죽음이 이곳으로 모여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수없는 눈송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고, 마침내 남는 것은 오직 침묵과 고요함이었기 때문이다. 그 신비로움 때문이었는지, 칙술루브에는 유난히 마법사와 주술사, 신과 영혼을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눈이 선물하는 침묵 속에서 마법과 주술을 연마했다.


  나는 쓰러져 가는 통나무집 앞에서 며칠 째 오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주린 배를 어떻게든 채우려 눈을 퍼먹다가 정신을 잃기를 반복했다. 축축한 길바닥에 몸을 뉘인 채 기어코 눈 사이에 뿌리를 내린 작은 새싹을 힘주어 노려보았다. 푸른 잎이 딱딱하게 얼기 시작했다. 


  ‘꼬마야, 너 근사한 마법을 할 줄 아는구나.’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언제나 나를 보며 혀를 차곤 했었다. 품이 그리워 손을 뻗으면, 고작 눈이나 내리는 능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며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녀의 첫 인사는, 내 생에 처음 받은 다정한 칭찬이었다.


  ‘안녕, 나는 렌이라고 해. 나와 함께 갈래?’


  렌이 손을 뻗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손을 잡았다.


  렌의 동굴은 미로 안에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고, 나는 빛나는 얼음 동상들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동굴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 렌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발을 들인 순간, 나에게 모여들던 여린 눈빛들을 기억한다.


  ‘자, 연우야. 친구들한테 네 마법을 보여줘야지.’


  나는 긴장되는 마음에 렌의 손을 꼭 쥐었다. 곧 동굴 안으로 한기가 돌더니 흰 눈이 내렸다. 아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렌을 올려다보았고, 렌은 그림같이 미소 지었다. 렌이 박수를 치자 곧 아이들도 하나둘씩 손뼉을 부딪쳤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아이들의 침묵 속에는 슬픔과 체념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들떠 신이 났던 것 같다. 동굴 안은 아늑했고, 잠자리는 따뜻했으며 음식 또한 풍족했다. 렌이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그림을 그리자 목덜미 즈음이 따끔거렸다. 내 몸에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헤베의 표식이 새겨졌고, 그렇게 나는 렌의 아이가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감미롭게 웃어주었고, 모두가 그녀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하지만 종종 새로운 아이가 렌의 손을 잡고 동굴로 오거나 혹은, 렌의 부름에 동굴 안 가장 깊숙한 곳으로 친구가 불려갈 때면 아이들은 행복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한 번 불려간 친구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우야.’


  어느 날 나의 이름이 불렸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리곤 뒤를 돌았다. 10년 전의 모습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렌이 손을 뻗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네, 어머니. 갈게요.’


  나는 렌에게 대답하곤 조그만 아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맑은 눈동자. 내가 이곳에 처음 왔던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어린 소년. 나는 아이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도망 가. 날개를 단 동상을 따라 가면 길이 있을 거야. 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렌의 손을 잡고 그녀를 따랐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이 입모양으로 소리 없이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화답하듯 그들 머리 위로 눈을 내렸다.


  의식은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 조차 모른 채, 낮과 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단단한 밧줄에 묶여 렌의 주술 의식에 산채로 바쳐졌다.


  소년은 영원히,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다. 끝없이 우주를 유영하리라. 


  길고 긴 의식이 끝나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렌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면, 차가운 손길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훑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언제나 짙은 보라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식물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여전히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고, 그녀의 표정과 기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어린 아이였다. 그녀는 내가 유순한 초식동물처럼 굴 때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의 따스함이 그 순간만큼은 눈을 가리고,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렌이 새로운 먹잇감을 물색하러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나는 타오르는 불꽃에 둘러싸인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까딱하니 눈이 내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그 날, 렌의 동굴을 뛰쳐나왔다. 나는 번쩍이는 얼음 동상을 지나쳐 미로의 입구를 빠져 나왔다. 앞을 향해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나는 눈 속에 온몸을 파묻었다. 긴 겨울잠을 준비해온 동물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눈치가 빠르다. 언제나 애정을 갈구하니까. 그 애정이 가짜라는 걸, 렌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의 껍데기를 사랑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랑이 시작되었다. 칙술루브를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았다. 죽음을 끌어안기 위해서 선택한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길고 지난한 삶과 다름없었다.


  의식이 끝나면, 렌은 내가 바라왔던 어른의 모습으로 잠시나마 돌아가곤 했다. 고대의 전설을 속삭이듯, 부드럽게 흔들리던 음성,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렌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내게 죽음을 선사할 이가 누구인지도, 이제는 안다. 나의 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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