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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두 개의 호수(1)

  해강은 입안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토해내듯이 뱉어냈다. 흔들리는 시야 안으로 붉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성난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고, 땅이 울렸다. 기도하듯 간절히 맞잡은 두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었다. 해강은 손목을 빙글 돌렸다. 매듭은 너무나 헐겁게 매여 있었다. 박의 저택에서 서커스를 연습하며 수백 번도 더 풀어본, 아주 익숙한 매듭이었다. 해강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니 한쪽 날개가 부러진 천사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해강은 그를 더 자세히 보려 눈을 가늘게 떴다. 


  꿈은 늘 거기서 끝이 났다. 색이 바란 미색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해강은 어제 일처럼 생생한 꿈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주름진 뺨 위로 눈물이 고였다 떨어졌다. 그렇게 몇 분이나 꼼짝도 않던 해강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몸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연신 마른기침을 하며 헐떡이던 해강이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폈다. 단출한 창문 너머로 작은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해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참이나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성당에 딸린 해강의 방은 본래 어느 독실한 수도사가 머물던 방으로, 방 한쪽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작고 오래된 제단이 있다. 해강은 제단 위에 신 대신 생명을 두었다. 척박했던 클리어워터 레이크에 뿌리를 내린 토착종의 나무 씨앗들. 이제 막 새순을 피운 작은 나무들. 그리고, 그 옛날 황폐했던 황무지에서도 만개했던 이름 모를 연분홍색 꽃. 눈을 뜨자마자 꽃을 찾는 것은 해강의 아주 오랜 습관이었다.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누군가를 생생히 떠올리게 했음으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어나셨어요? 오늘 같이 나무 심으러 가기로 하셨잖아요!”


  문 너머로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느껴지자 해강이 화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곧 나가마.”


  해강은 천천히 거울 앞에 섰다. 둥그런 거울 안에 늙고 지친 한 노인의 얼굴이 들어찼다. 갈색 머리칼은 어느덧 하얗게 물들었고, 얼굴에는 세월이 깃든 깊은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청년은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는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오랜 시간 크레이터의 암살자들을 피해 떠돌던 해강과 재윤이 정착한 곳은 클리어워터 레이크였다. 해강은 황무지 속에 피어난 청록빛 샘을 발견하고 비로소 고향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그러니까 연우와 함께 봤던 이곳은, 환상 속의 오아시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강은 그때 결심했다. 이곳에서 연우를 기다리기로.


  척박하고 황폐했던 땅, 클리어워터 레이크는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뜨거운 태양만은 그대로였지만, 화려한 위용을 자랑했던 박의 저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신비로운 샘 중심으로 푸르른 생명이 하나둘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해강과 재윤은 박의 저택에서 몰래 빠져나왔던 어린 시절처럼, 황무지에 나무와 식물을 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두 사람을 본체만체 하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두 사람을 돕고 싶다며 모여 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자 클리어워터 레이크는 그 옛날 신의 땅이라 불렸던 그 모습 그대로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붉은 머리칼을 짧게 친 여자가 흰 베일을 걷어내며 뒤를 돌았다. 해강이 성당의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몇 번 손짓하자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우거진 숲을 향해 뛰어갔다. 


  “너도 참, 애들한테 약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니까.”

  “말도 마. 이제는 힘들어서 놀아주지도 못해.”


  이내 해강이 계속해서 마른기침을 토하자 재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해강의 등을 토닥였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네.”

  “…뭐, 나이 들어서 그렇지.”


  해강이 어깨를 으쓱하고 성당으로 들어섰다. 재윤이 그런 해강의 뒤를 따랐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공간 안으로 뜨거운 한낮의 햇살이 들어찼다. 동그란 창에는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섬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흰 꽃으로 장식한 나무 제단 양 옆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천사의 형상이 나란했다.


  재윤이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해강은 재윤의 주름 진 두 손과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재윤에게 물은 적이 있다.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하느냐고. 기도가 아니라… 속죄야. 해강아, 언제쯤 날 용서해 줄래? 재윤의 말에 해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재윤의 손을 잡고 그저 앞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던 크레이터의 밤. 일단 살아남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당신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수십 년의 밤들이 떠올라서.


  “얼마 전에, 연우를 봤어.”


  재윤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해강의 손을 잡았다. 반면에 해강의 얼굴은 지나치게 평온하고 침착했다. 해강이 제단 옆에 자리한 천사 동상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해강은 그날,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심으러 클리어워터 레이크 국경 부근에 나와 있었다. 해강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토양을 쓸어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흩어지는 흙의 느낌이 좋았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고개를 들자, 국경 너머로 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칼, 꼿꼿한 등과 느긋한 발걸음. 해강은 홀린 듯이 일어나 국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아이들이 그런 해강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따랐다.


  연우였다. 그는, 젊은 날 만났던 그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두 사람이 함께 했던 그 찰나의 시간 속에 정지한 듯이. 이제 단 한 걸음, 이 국경을 넘어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처럼 다정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해강은 손을 뻗었지만, 이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리곤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자신의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당신이 내게 끝내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 영원한 젊음이었다면, 더 이상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어. 나는 변했으니까.


  ‘당신은… 신인가요?’ 테이아에서 연우를 붙잡고 두서없는 말을 쏟아냈던 노인과 자신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신연우와, 늙고 지쳐버린 주해강. 도무지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연우가 우뚝 멈춰 서자, 해강이 황급히 몸을 돌리고 아이들 사이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빠르게 몰려오는 이 어둠이 부디 나를 가려주기를. 


  어디 아프세요? 왜 울어요? 해강은 덩달아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렇게 한참을 떨다가,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밤이 내려앉은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 후로 다시는 연우를 보지 못했다.


  담담하게 이어가는 해강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재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로 젖어들었다. 


  “그렇게 아팠으면서. 그토록 그리워했으면서, 왜 부르지 않았어?”

  “재윤아, 혹시 연우를 만나게 되면… 이 말을 꼭 전해줘.”


  해강이 고개를 숙여 재윤에게 한참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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