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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두 개의 호수(2)

  재윤은 해강의 이마 위로 천천히 입술을 내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강아.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널 찾아갈게.”


  해강은 마치 좋은 꿈을 꾸듯 부드러운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관속에 누워있었다. 해강은 연우를 우연히 만난 일화를 들려준 후로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던 어느 평범한 날, 점심시간이 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해강이 걱정되어 방문을 두드렸던 날. 해강의 숨은 멈춰있었다. 


  해강의 장례식 날. 마치 마법처럼, 신연우가 클리어워터 레이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미사가 울려펴지는 성당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해강의 죽음을 예상한 사람처럼 슬피 울었다. 박의 저택에서 처음 만난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심장께로 가지런히 모인 해강의 두 손에는 연분홍 빛깔의 꽃다발이 있었다. 인간의 영혼이 이 땅에서 완전히 발을 떼기 전,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감각은 청각이라 한다. 재윤은 남자의 고백이 부디 해강에게 닿기를 바랐다.


  “…해강은, 행복하게 살았어요.”


  재윤의 말에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 눈을 맞췄다. 그는 청년의 모습을 한 채, 텅 빈 얼굴로 재윤을 내려다봤다. 


  “마법, 서커스, 폭력과 죽음… 그 모든 것에서 멀어진 채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았어요.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우리는 나무와 꽃을 심었어요. 처음에는 죄다 죽었지만요. 그래도 해강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몇 년이 지나자 샘의 물을 머금은 작은 나무들이 한두 그루씩 자라나더니, 이제는 거대한 숲을 이룰 만큼이 되었죠. 우리는 정말 행복했어요.”


  조용히 말을 이어가던 재윤이 기도하듯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가 성당 안을 울렸다.


  “하지만 동시에 해강은 외로웠어요. 너무나 고독했어요… 내 무지 때문에, 내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망쳤어요. 다 내 탓이에요. 미안해요.”


  연우는 아이처럼 우는 재윤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눈가에 깊이 파인 주름이 세월의 흐름을 실감나게 했다. 


  “애초에 내가 해강에게 모든 걸 말해줬었더라면, 내게 뿌리 깊게 박힌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토록 외롭지 않았을 거예요. 제게 해강을 찾아 헤맨 세월은 그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어요. 왜 그토록 자신했을까요? 아니,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몰라요. 나의 세상과 해강의 세상은 다르다는 걸


  깊은 슬픔에 잠긴 연우를 바라보며, 재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강이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이 말을 꼭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긴 시간이 흐른 뒤카페 테이아.

  빛바랜 책장을 넘기고 있는 해강.


  너는 괴물이 아니야. 그저 외로운 사람일 뿐이지.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거기까지 읽고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사실 신연우가 불쑥 내민 것은 책이라기보다는 역사 드라마에 나올법한 고서적과 다름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얇은 양피지에 정갈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신연우의 말끔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어깨를 살짝 들어올렸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나보고 이걸 다 믿으라고요?”

  “그래도 거의 다 읽어줬네요. 이 뒤에는 재미없어요. 절절한 내 마음밖에는 적혀있질 않으니까.”

  “…미쳤군요.”

  “언젠가 다시 당신을 만나면 보여줄 수 있는 건 글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과거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기를, 그게 아니라면 이 글을 읽고 우리를 떠올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죠.”

  “신연우씨. 나는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 주해강이 아니에요.”

  “알아요. 해강씨는 그냥 해강씨죠. 저는 그냥… 해강씨가 궁금해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하루에 커피는 몇 잔이나 마시는지. 저녁시간에 주로 뭘 할까도 궁금하고. 여행을 갈 때 계획을 세우고 가는 편인지, 아니면 발걸음 닫는 대로 즐기는 편인지도요.”


  그가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나를 바라봤다. 저 눈을 마주할 때마다 현실을 잊게 된다. 꿈속에서 본 장면과 그의 소설 속 장면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였다.


  “해강씨?”

  “그런데요, 내가 만약 소설 속 주해강이라면요. 신연우에게 같은 말을 해줬을 거예요. 다시 만나면 솔직하게 뭐든 말해줘도 괜찮다고요. 전혀 이상한 존재나 괴물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소설 속의 연우.” 

  “거봐요. 해강씨는 그냥, 해강씨라니까요.” 


  신연우는 웃으며 책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 그것을 받아들었다. 손끝으로 색이 바랜 표지를 쓸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랑, 청명한 풍경 소리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카페를 나서자 찬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파묻으니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두 손에 쥐여진 초콜릿 라테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신연우가 손을 흔들고 있었고, 카페 앞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작별의 말을 연습했던 내가 마주한건, 오래된 책을 내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푼 얼굴을 하던 당신이었으니까.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체념과 절망으로 당신까지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신연우를 만난 지도 네 달이 지났다. 능소화가 만개하던 여름을 지나 아주 짧은 가을이 스쳐지나갔고, 그렇게 겨울이 찾아왔다. 무심하게 계절이 바뀌는 동안, 꿈과 환상은 계속해서 나를 두드렸다. 신연우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매일 밤 나를 찾아왔다. 그와 더 함께 하고 싶어 꿈에서 영영 깨지 않기를 바랄 때도 많았지만, 속절없이 새벽은 밝아왔다. 나는 나와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꿈속의 주해강이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나와 달리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어떤 시련에도 부러지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사무실로 돌아와 칭칭 감긴 목도리를 풀어내자 히터 바람이 훅 끼쳐 들어왔다. 어찌나 힘껏 둘러맸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는 나를 가볍게 무시하며 목도리를 매어 주던 신연우가 선연히 떠올랐다.


  “해강씨, 오늘도 테이아?”


  음료를 자리에 놓아두자 옆자리에서 기지개를 펴던 지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지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 카페 사장님이랑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딱히 친한 건 아닌데요.”

  “점심시간만 되면 급식 시간만 기다려온 학생처럼 튀어나가는 게 누구더라? 내 눈은 못 속여요.”


  내가 그렇게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나랑은 마지막까지 점심도 안 먹어주고. 지우가 작게 투덜거리자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밉지 않게 노려보던 지우가 파티션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회식 올 거죠? 해강씨 환송회 겸 회사 송년회!”

  “아, 죄송해요. 미리 잡아둔 약속이 있어서.”


  대박, 당사자 없는 환송회라니. 식당 예약도 다 해놨는데… 지우가 충격 받은 얼굴로 중얼대며 파티션을 타고 미끄러졌다. 하나둘 직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연말 휴가 계획에 들떠 있었고, 창문 너머로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북적거리는 수다와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진동하는 사무실을 빙 둘러보았다. 정규직 전환은 실패했다. 계약 종료일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팀장이 회의실로 불러 인사 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통보했다. 답지 않게 어색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퇴직을 전하는 팀장의 모습이 낯설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자리에 세워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팀장님, 이 회사를 나간다고 세상이 끝나진 않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한 표정 안 지으셔도 돼요. 저는 어떻게든 살아갈 거니까.’ 나는 속에 있던 말을 삼키고 마지막까지 웃는 낯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심심한 작별이었다.


  꾸역꾸역 버텨온 이 지난한 풍경도, 그리고 그 삭막함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격의 없이 대해준 지우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나는 지우의 책상에 엉성하게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내려놨다. 지우가 눈을 커다랗게 뜨자, 나는 그를 향해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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