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하시겠어요?”
친절한 물음에 어떤 답도 하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은조. 내가 답이 없자 은조가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혹시. 여기 사장님이요. 요즘 가게 안 나오신다고 들었거든요. 전해줄 게 있는데.”
나는 한 손에 든 쇼핑백을 움켜잡았다. 신연우의 남색 목도리와 그가 쓴 책. 그 날 지우의 문자를 받고 무작정 버스표를 끊었다. 돌려줄 게 있으니까, 그럴 듯한 핑계를 되뇌며. 모두가 잠든 버스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 신연우의 번화로 전화를 걸었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길어지다 곧장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사장님 몸이 안 좋으셔서 당분간 못 나오시는데. 제가 나중에 전해드릴까요?”
은조가 넉살좋게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직접 전해줄게요. 저… 은조씨.”
은조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이 나를 바라봤다.
“초콜릿 라테 한 잔 주세요.”
한 손에는 쇼핑백, 한 손에는 라테를 들고 테이아를 빠져 나왔다. 나는 점심시간에 종종 지우와 앉아 커피를 먹곤 했던 벤치에 앉아 라테를 홀짝였다. 밍밍했다. 원래 이런 맛이었나. 심호흡을 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달칵, 끊겼다.
신연우의 집은 카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철문 앞에 서 있다가 그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의 집은 어둠에 잠겨있었고, 으슬으슬한 한기가 돌고 있었다. 나는 노란 불이 깜빡이는 현관문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쇼핑백을 내려놓고 그의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가장 안쪽에 문을 반쯤 열어둔 방이 보였다. 달빛만이 캄캄한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신연우는 어지러이 흩어진 이불 위에 신음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방 안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정말로 흰 눈이었다. 꿈이나 환상이 아닌, 진짜 눈.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내리 앉은 겨울. 이상하게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신연우.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그의 얼굴에는 기나긴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듯 익숙한 표정이었다. 나는 마치 오랜 습관처럼, 그를 품에 안았다.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을 괴롭히는 게 무엇이든, 언젠가는 모두 지나갈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위로와 사과의 말을 속삭였다. 어느 순간 잠에 들었고, 나는 그의 꿈속으로 들어섰다.
나는 무한한 공간에 떠 있었다.
눈앞에 문이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밖은 온통 칠흑이었고, 과거로부터 온 별의 잔해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곳은 우주였다. 발을 뻗자 내 몸은 무게를 잃고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찾는 지도, 바라는 지도 모른 채 우주를 떠다녔다.
얼마나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았을까. 발끝을 간질이는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 검은 베일. 검고 반짝이는 거대한 베일이 나의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옥죄고 있었다. 베일을 얼굴 앞으로 드리운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검은 새와 죽은 별들이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테라, 비로소 날 찾아왔구나. 언젠가 날 찾아올 걸 알고 있었지. 생각보다 아주 늦었구나.
당신이 렌이군요.
난 연우의 미래를 알아. 내가 그 아이를 창조했으니까. 너 때문에 신연우는 죽을 거야. 그가 가진 아름다움은 빛을 잃고, 젊은 육신은 고통스러운 삶속으로 뛰어 들면서 헤지고 늙어가겠지. 그의 생은 절망으로 가득차고, 육신은 질병으로 썩어 갈 거야. 그래도 괜찮겠니?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대한 베일은 어느새 내 목 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가시처럼 살을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웠으나, 한때는 내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누구도 날 찾지 않는 어둠속에서 눈을 감고 싶을 때가 많았으니까. 나는 턱을 타고 올라와 두 눈을 가리려는 베일을 뜯어냈다. 베일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찢어졌다. 마침내 온 몸이 자유로워졌다.
렌, 당신이 신연우를 정말 사랑한다면 이제 그만 놔주세요. 외로웠던 아이가 당신을 부모처럼 따르며 애정을 건넸던 짧은 날마저 잃고 싶지 않다면요. 당신도 당신이 만든 이 외로운 우주에서 너무나 고독하지 않나요? 모든 삶은 끝이 있기에 아름다운 거라는 걸, 당신도 이미 알고 있잖아요.
검은 베일이 그녀의 몸을 옥죄기 시작하자 렌이 비명을 내질렀다. 차마 울려 펴지지 못한 외침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렌의 육신은 산산이 부서졌고, 남은 것은 부드럽게 반짝이는 베일뿐이었다. 그것은 물결처럼 물러났다.
나는 우주 저편에서부터 다가오는 흰 빛을 응시했다. 억겁의 시간을 지나, 한 국가가 탄생하고 멸망하는, 그렇게 아주 길고 긴 시간 동안 바라왔던 충돌의 순간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긴 여행의 끝에 우리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호수 앞에 서 있다. 지구를 향해 다가온 운석과 뒤이어 발생한 폭발. 그리고 충돌 뒤에 남은 흔적인 쌍둥이 호수, 클리어워터 레이크. 내 앞에는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다. 손도 대지 못한 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런 내 삶에도 아주 가끔은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내 옆에는 당신이 있다는 걸.
신연우가 나의 손을 잡았다. 겨울처럼 차가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를 덮은 긴 머리칼이 부드러운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겨울을 마주 잡았다. 따스했다.
그를 만나고, 나의 우주가 변하고 있었다.
끝.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