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두 개의 호수(3)

  ‘상담사 한재윤’이라고 적힌 명패가 조금 비뚤게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명패를 바르게 조정했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네-’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상담실 여기저기에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익숙하게 앉았다.  


  “오늘이 마지막 상담이네요.”

  “회사를 그만두게 돼서요. 당분간 이쪽으로 올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고향에 내려가 있으려고요.”

  “아쉽네요. 그동안 해강님, 정말 잘 해주셨거든요.”

  “감사해요. 선생님 덕분이었어요.”

  “자, 그럼 작별 인사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볼까요? 어제도 꿈을 꾸셨나요?”


  나는 허리까지 오는 구불구불한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꿈을 소환했다.


  “아름다운 마을을 걷고 있어요. 봄에는 꽃이 피고, 겨울에는 눈이 오는 곳이에요. 이름은 테이아. 우리는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작은 집에 살고 있어요. 어느 날 저는… 화가 난 것 같아요.”

  “왜 화가 났나요?”

  “그는 자신이 쓰는 글을 저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어요. 시간이 흐르는 게 정말 행복했거든요. 하루하루가 벅찼어요, 그땐.”


  나는 말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거 아세요? 요즘 해강님 얼굴이 많이 편안해 졌다는 걸요. 마치 그림자가 한 겹 벗겨진 느낌이랄까요. 꿈은 계속 기록해 두세요. 좋은 꿈은 꺼내보고 싶을 때마다 보시고요.”


  상담실 창 너머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 눈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주춤거렸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 선생님.”


  서류를 정리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결국 아무 것도 묻지 못한 채 입술을 감쳐물었다. 의아해 보이는 얼굴을 뒤로 하고 천천히 상담실을 빠져 나왔다.


  귀 끝을 간질이는 느낌에 목도리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회색의 캔버스에 점점이 눈발이 흐드러졌다.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날 저녁 카페 테이아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리듬에 맞춰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만이 어두운 내부를 비춰주고 있었다. [해강씨, 메리 크리스마스.] 마지막으로 온 신연우의 문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고향은 그대로였다. 바다를 향해 쭉 뻗은 내리막길 위에 뿌리를 내린 오래된 나무, 그리고 나무만큼 나이를 먹은 집과 사람들. 노동자들 몇몇만이 불콰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작은 식당들. 거친 아스팔트 바닥 위로 캐리어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나니 할머니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이곳은 내가 유년을 보낸 곳이다. 비좁은 골목 사이 담벼락마다 짓궂은 아이들의 낙서가 새겨져 있고, 찌그러진 빈 캔과 이름 모를 들꽃이 나란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자 붉을 밝힌 1층 식당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머, 해강이 아니니?”


  식당 이모가 물기에 젖은 손을 탈탈 털며 나를 안았다. 나는 엉거주춤 그녀를 마주 안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대신 나를 품에 안아주던 따뜻한 품이 아직도 생생했다.


  “잘 지내셨어요?”

  “자주 좀 오지, 이모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한동안 가만히 등을 쓸어주던 그녀가 내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시선에 웃음이 나왔다.


  “우리 해강이, 많이 컸네.”

  “당분간은 할머니 집에서 지내려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노인데, 어찌나 꼬장꼬장한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곧 죽을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다가도, 너한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면 그러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라. 평생 해강이 너 한 번 안아준 적 없는 정 없는 사람도 손주 걱정 끼치긴 싫었나보지.”


  나는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이모는 안타까운 얼굴로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 가게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멈칫했다. 술에 취한 손님들이 소주병으로 식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모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모, 바쁠 텐데 들어가세요. 내일 가게 들를게요.”

  “내 정신 좀 봐. 이 먼 곳까지 오느라 피곤했겠네. 얼른 들어가서 쉬어.”


  나는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이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의 집은 이 오래된 건물의 2층에 있다. 비뚤비뚤한 아스팔트 계단은 폭이 일정하지 않아서 거의 허리께만큼 다리를 들어 올려야하는 구간도 있다.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성큼성큼 잘도 오르내렸던 계단이, 어른이 된 지금은 어쩐지 버거울 정도로 힘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기억해 낼 수 있는 건 늘 냉정하게 돌아서 있던 뒷모습과 팔다리가 앙상할 정도로 마른, 마치 갓 태어난 아이 같았던 마지막 순간뿐이었다.


  이윽고 사람의 온기가 떠난 황량한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엔 말리다 만 고추가 길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일을 쉴 순 없었다. 할머니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유산은 모두 빚을 갚는데 쓰였다. 지금까지 모아둔 돈과 퇴직금으로 몇 달은 이대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 작은 마을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가끔 이모 가게의 일손을 도왔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2층으로 올라와 쓰러지듯 잠에 드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 해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던 기억이 난다. 인적이 드문 고요한 새벽길을 걸을 때마다 짙은 입김이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오랜만에 주어진 휴일. 습관처럼 동이 터오를 때 일어나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더 이상 청소할 곳이 없었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우려 애써 눈을 감았다. 요즘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속의 나와 신연우, 신비로운 마법들과 밀려오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 그 모든 환상이 어느 순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도망치고 싶어.

  무엇으로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과 끝내 내리지 못한 답들. 나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박아둔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몇 달째 풀지도 않고 가만히 묻어둔 기억들이 어지럽게 엉켜있었다. 가방 바닥까지 손을 뻗자 단단한 책등이 만져졌다. 신연우와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헤어진 그 날, 그가 내게 내민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이상한 책. 나는 조심스레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렇게 꼼짝도 않고 책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겨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순간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지우였다. [해강씨, 우리 회사 정규직 자리 났는데 지원 안 해볼래요? 아니 글쎄 팀장이 가끔 해강씨 그립다고 한다니까? 일 하나는 묵묵히 잘 했다면서. 이제 와서 저러는 게 진짜 웃기지도 않아. 있을 때나 잘하지.]


  문자 하나에도 지우의 수다스러운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아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답장을 하려다 손을 멈췄다. 핸드폰 화면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그런데 해강씨 좋아하던 카페 있잖아요. 지난 몇 주간 말도 없이 가게 닫더니 요즘엔 사장 나오지도 않아요. 알바생만 있던데?]


  마음이 쿵 떨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신연우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지난 몇 달간 그의 모든 연락에 답하지 않은 건 바로 나인데도.

이전 23화 [해강의 우주] 두 개의 호수(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