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위에는 한쪽 날개가 부러진 천사 동상이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우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동상에 마구 머리를 부딪쳤다. 그의 머리칼 사이로 끈적한 피가 흘렀지만,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허리와 손목 모두 동상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렌은 옛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는 예의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연우에게 알 수 없는 식물과 약물을 먹였다. 연우는 렌을 처음 만난 일곱 살로 돌아갔다. 그리고 주술 의식에 저항 없이 끌려가던 덜 자란 소년으로도 돌아갔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어린 시절로부터 한 뼘도 자라지 못한 것이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를 간질이던 소음은 몸집을 부풀려가더니, 어느새 사람들의 함성 소리로 변해 귓전을 때렸다. 연우는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에는 어림잡아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잔뜩 흥분한 이들의 발 구르는 소리와 비명 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한 곳을 향해 돌멩이와 폐허 더미를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이 사형 집행일이라고 했던가. 해강은 어디 있지?’
연우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외쳤다. 해강아, 해강아. 하지만 그의 외침은 허공에 흩어지고, 흥분에 미쳐 날뛰는 군중들의 소란에 빨려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때, 광장의 한 가운데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날아오는 돌덩이를 그대로 맞고 있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달빛을 따라 흔들렸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눈을 맞췄다. 해강이었다.
재윤은 성문 뒤편 어둠속에 모습을 숨긴 채 해강을 바라봤다.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눌러 쓴 채 광장의 한 가운데에 쓰러진 그를. 해강아, 미안해. 재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재윤의 붉은 머리칼은 두건 속에 감춰져 있었다. 해강은 어느 순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 광경을 바라보던 재윤은 입술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렌의 기다란 손가락에 재윤의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피가 나잖아.”
“…지금까지 어디에 있던 거예요.”
“네가 꿈꿔왔던 순간 아니니? 표정 한 번 살벌하구나.”
“렌, 당신이 꿈꿔왔던 순간이겠죠. 해강에게 저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씌우고 미친 군중들 속에 던져넣다니. 크레이터 원주민들이 한재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지 않나요? 해강은 언제 구할 건가요. 당신이 원하는 건 신연우 뿐이잖아!”
“윤아.”
재윤은 달콤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약한지 알면서.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만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넌 내가 봐온 아이 중에 최고였지. 내가 원하고 바라는 건 뭐든 기대이상으로 해내왔어.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렌이 두건 밖으로 흘러나온 재윤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입술 끝을 그림 같이 끌어올렸다. 재윤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며 렌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모든 게 끝나면… 당신은 나를 떠날 건가요?”
광장의 혼란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재윤을 죽여라! 우리의 마을을 파괴시킨 마녀, 저 년을 어서 단두대에 세우라고! 당장 칼날을 떨어뜨려!
재윤과 렌은 열기와 흥분으로 가득 찬 광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렌이 기다란 손끝으로 재윤의 뺨을 훑었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를 아로새기듯이.
“불쌍한 나의 아이… 외로움은 다루기가 너무 쉬워.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희망에 부풀지.”
“…내 마음을 이용했군요.”
렌은 중얼거리듯 내뱉는 재윤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광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재윤은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재윤은 시선을 옮겼다. 단두대에 무릎을 꿇은 자신, 아니, 해강이 보였다. 해강의 머리 위로 무거운 칼날이 당장이라도 낙하할 듯 삐걱대고 있었다. 재윤은 저택을 떠올렸다. 불타는 헛간과 울부짖던 동물의 신음소리. 박의 끔찍한 마술에 제물로 바쳐졌던 해강, 쏟아지는 발길질을 대신 맞아주며 ‘괜찮아’라고 속삭이던 해강을. 재윤이 거칠게 두건을 벗자 풍성한 머리칼이 흘러 내렸다. 광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재윤은 목덜미에 닿는 스산한 감촉에 숨을 들이쉬었다. 예리한 칼날이 당장이라도 목을 찌를 듯 가까웠다.
“크레이터에 너와 비슷한 기운을 내뿜는 마법사가 등장했을 때부터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비겁한 놈. 설마 우리를 벌레처럼 짓밟고 도망치려고 했나?”
재윤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쪽 눈에 상처가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거칠게 저항하는 재윤의 입을 틀어막고 광장으로 들어섰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두 사람을 스쳤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막아서는 사람들을 제치고 광장의 한 가운데에 재윤을 내동댕이쳤다.
“여기 진짜 마녀가 있다!”
재윤이 콜록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친 바닥에 쓸린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무릎을 꿇은 해강에게 다가가 가짜 가발을 쥐어뜯었다. 해강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해강과 재윤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동요하기 시작했다. 분노가 번져가고, 흥분이 고조되었다. 광장은 붉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박의 저택에서 서커스를 하던 그때처럼.
렌, 당신은 끝까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군요. 재윤은 모든 것을 체념했다. 여기가 끝이었다. 그가 온몸에 힘을 빼고 바닥에 머리를 기대려는 찰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재윤아, 여기 봐. 해강의 목소리였다. 재윤이 눈을 크게 떴다. 해강은 놀랍도록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가 두 손바닥을 펼쳤다. 매듭이 풀려있었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야. 하나, 둘…
죽여라!
흥분한 사람들이 두 사람을 향해 마구잡이로 돌진했고, 이내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붉은 연기를 들이마신 채 핏발이 선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구타하고, 죽이기 시작했다. 한때는 크레이터의 신실한 학자였던 사람들과 박의 저택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외쳤던 시위대가 두서없이 뒤섞였다.
연우의 손목은 피투성이였다. 그는 동상의 한 쪽 날개를 잡고 망설임 없이 광장을 향해 뛰어 내렸다. 왼쪽 다리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다리를 부여잡고 흥분한 군중 속으로 들어섰다. 그의 몸은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간 듯이 이리저리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가 찾는 것은 단 하나였다.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죽고 다친 사람들이 폐허처럼 쓰러져 있었다. 연우는 광장의 한 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해강이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정신없이 시체 더미 사이를 헤치다 갈색 머리칼을 발견하면 숨을 참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얼굴을 부여잡으면 생을 잃은 낯선 눈동자들이 눈을 맞췄다.
연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너무나 익숙하고, 또 너무나 끔찍한, 식물 타는 냄새. 연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렌은 처음 만난 그때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네 테라는 죽었어.”
“아니, 해강은 죽지 않았어. 빌어먹게도 난 아직도 네가 만든 우주를 떠돌고 있고, 빛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연우는 천천히 일어나 렌을 내려다보았다. 연우가 기억하는 렌은 언제나 닿을 수 없는 첨탑처럼 크고,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원래 이렇게 작았던가? 이렇게 볼품없었던가?
연우의 뒤로 눈부신 새벽 동이 내려앉았다. 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아름다운 작품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그녀의 두 눈이 황홀경으로 가득 찼다.
“어머니, 더 이상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연우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단숨에 렌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그녀의 눈이 순간 커지더니, 이윽고 피를 울컥 토하며 쓰러졌다. 주술사의 온몸을 휘감고 있던 주술과 마법이 사라지자, 검버섯이 피어난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깊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부들거리며 연우의 발목을 잡았다.
“나의 연우야, 나는 죽어서도 네 꿈에 찾아갈 거야. 잊지 마, 난 언제나 네 영혼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걸…”
렌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며 숨결이 스러졌다. 연우는 한숨을 토해내며 허공을 바라봤다. 새벽 햇살 위로 눈송이가 떨어졌다. 시체 더미를 헤치며 생긴 생채기가 감쪽같이 아물기 시작했다.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연우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희미한 음성을 들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헤쳐 자신을 부른 이를 찾아냈다. 그는 쓰러진 단두대에 하반신이 깔려있었다.
“네 말이 맞아…”
은조였다. 연우는 그를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주해강은 죽지 않았어. 광장을 빠져나가는 걸 봤다.”
그의 목소리가 헐떡이기 시작했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은조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은조와 멀지 않은 곳에는 산이 쓰러져 있었다. 연우는 피가 묻은 산의 붕대를 풀었다.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그의 영혼은 넘실거리는 회색 안개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연우는 산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연우는 왼쪽 다리를 절뚝이며 저 멀리 숲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가 크레이터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에도 광장에는 몇날 며칠 눈이 내렸다. 흰 눈은 그곳에서 일어난 죽음과 소란 위로 켜켜이 쌓여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