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다시 올게요. 테이아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곳인걸요.”
진은 말을 타고 마을을 떠나는 해강과 연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고새 정이라도 들었나보지, 나도 참 나이 들어서 주책이야. 진은 괜히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머쓱해져 투덜거렸다. 그 짧은 인사가 해강과의 마지막 만남인 것도 모른 채.
기나긴 여정이었다. 안온한 둥지였던 테이아를 벗어나자 다시 방랑의 시작이었다. 이번에는 명확한 목적지가 있었지만. 저 멀리 얼음의 땅이 모습을 드러내자 해강은 정들었던 말을 풀어주었다. 어서 가. 넌 살아남지 못할 거야. 어디든 가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 아무리 가라고 소리쳐도 말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두 사람을 따라왔다. 연우가 마지못해 돌멩이를 던지자, 그제야 말은 평원을 가로지르며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얼음의 땅을 밟았다. 살을 에는 추위에 해강의 입술이 딱딱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얼음 위로 몇 번이나 넘어지려는 해강을 연우가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을까. 새하얀 털로 뒤덮인 거대한 설인이 얼음의 땅의 국경을 우뚝 지키고 서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 앞에 멈춰 서더니, 한동안 해강과 오래도록 눈을 마주쳤다. 얼음으로 엉겨 붙은 털 사이로 설인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연우가 눈꽃을 내리자, 설인은 거대한 발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사라졌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해강은 종종 이 순간을 소환해내곤 했다. 거인의 형형한 눈동자를,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얼음의 땅을 수호하는 신이시여, 그때 내게 무슨 말을 건네려고 했나요? 이제 네 삶에 마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경고였다면, 그때 당신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강은 연우의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크레이터에 도착했다. 해강은 주변을 기민하게 두리번거렸다. 연우의 말대로 이곳은 테이아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금이 간 채 버려진 집들, 깨진 유리창과 벽돌의 파편으로 가득한 거리.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하수구 냄새에 해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본래 우아하고 아름다웠을 사암 건축물들은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발을 들인 순간, 끈질기게 따라붙는 여러 개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온몸에서 냉기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생기를 잃은 채 널브러져 있던 거리의 사람들이 낯선 이의 등장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앙상한 손마디를 내밀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연우는 품속의 온기가 식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급히 마법을 잠재웠다. 신경이 곤두선 탓에 해강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한기를 마구 풀어내고 있었다. 크레이터는 연우가 들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해 보였다. 재윤씨가 여기 있다고? 도대체 왜?
“미안해. 추웠지.”
해강은 금세 잦아드는 한기에 연우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연우야, 여기 사람들… 좀 이상해.”
“마약 때문이야. 크레이터는 신비주의자들의 마을이었지. 한때는 모두가 독실한 성직자이자 학자들이었다고 들었어.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마약과 마법이 이곳을 망쳤다고 들었어.”
“…재윤이는 하필이면 왜 이곳으로 온 걸까?”
“맞아, 여기는 시위를 일으킬 만한 곳이 아니야. 재윤씨가 평소에 크레이터에 대해 말한 적 있어?”
해강이 고개를 저었다. 재윤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지만 한 번도 크레이터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재윤이 폭동을 일으킬 거라는 것도. 분명 클리어워터 레이크에 남아있겠다 했었는데, 연고도 없는 이곳까지 오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검은 두건을 푹 눌러쓴 한 사람이 해강의 팔을 강하게 붙들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두건 사이로 빛을 잃은 눈동자와 푹 꺼진 얼굴 살이 보였다. 그의 한쪽 눈에 칼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머, 머, 먹을 것 좀 다, 다오.”
연우가 반사적으로 그를 떼어냈다. 깜짝 놀라 굳어 있던 해강이 가방에서 빵 한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그는 게걸스럽게 빵을 먹어치우며 한발자국 다가왔다.
“약은, 야, 약은 없니?”
“실례합니다. 혹시 재윤이… 한재윤을 아시나요? 허리까지 오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예요. 아니면, 두 눈에 회색 안개를 지닌 산은요? 보신 적 있으세요?”
“…네놈이 그 자를 어떻게 알지?”
흐리멍덩했던 그의 눈이 재윤의 이름을 듣자 사납게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망토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가슴께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연우가 그를 똑바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곧 남자의 두건이 딱딱하게 얼어붙기 시작하고, 핏기를 잃은 입술 사이로 치아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연우는 점점 자신들에게 모여드는 시선을 의식했다. 연우는 해강의 손을 잡고 두건을 쓴 자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때 등 뒤에서 미약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마법사군.”
연우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이상하군. 기운이 비슷하단 말이지… 마녀의 제자인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하, 환영 인사가 늦었군. 겨울의 마법사여, 크레이터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는 온갖 신비로운 것들을 숭배하지.”
두건을 쓴 자가 깡마른 팔을 과장되게 휘두르며 고개를 숙였다. 거지들이 두 팔을 뻗으며 두 사람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연우는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때, 두 사람을 둘러싼 무리 뒤로 어떤 외침이 들렸다. 주해강! 해강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들던 거지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해강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영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해강의 팔을 잡고 무리 밖으로 끄집어냈다.
“…이은조?”
해강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은조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역시, 나를 알고 있었구나. 너도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재윤은 지금 어디 있어? 산은?”
강렬한 기쁨도 잠시, 해강이 곧바로 재윤의 행방을 묻자 은조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때 연우가 은조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연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은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신연우다. 죽은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니! 심지어 이곳, 크레이터에서 만나다니. 신연우는 기억할까? 내가 저택의 주인에게 모든 것을 밀고하고, 당신의 머리통을 망설임 없이 내려 쳤다는 사실을? 한동안 대치가 계속되자 거지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은조는 신경질적으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닥쳐! 더 소란을 피우면 다음 배급은 없는 걸로 하겠다. 다들 물러나.”
거지들이 온몸을 망토로 휘감으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던 거리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당신, 저택의 하인이었나요?”
연우의 물음에 은조가 슬몃 미소를 지었다. 신연우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은조는 여전히 날선 경계심을 잔뜩 세운 연우를 바라보며 이죽거리며 웃었다.
“저택의 주인이 죽은지가 언젠데 하인은 무슨.”
“혹시 재윤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지? 몇 년 만에 나타나서는 ‘폭동’의 주동자부터 찾다니. 근위대가 보낸 첩자일줄 어떻게 알고?”
그때 해강이 은조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연우는 날 살려준 사람이야. 함부로 말하지 마.”
“주해강, 너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널 환영할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재윤이를 보러 아주 멀리서부터 이곳에 왔어. 나도 알아, 혼자 사라진 내가 원망스러울 거라는 걸…. 그렇지만 넌 알잖아, 나랑 재윤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아꼈는지.”
은조는 문득 해강과 눈높이가 비슷해졌음을 깨달았다. 침묵에 잠겨 몽상에 젖어있던 아이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은조는 그런 해강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모두 은신처에 숨어 있어. 조용히 따라와.”
은조가 턱짓하자 숨죽여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거지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 마녀가 말했었지… 언젠가 신연우와 주해강이 제 발로 자신들을 찾아올 거라고. 입만 열면 신연우, 신연우 타령을 하기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미친 여자인줄 알았는데. 은조는 뒤 따라오는 두 사람을 힐끔 돌아보았다. 해강의 두 뺨은 햇빛이 묻은 듯 발그스름한 혈색이 돌고 있었고, 야위었던 몸은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었다. 은조는 훌쩍 커버린 해강의 모습에 왠지 모를 분한 느낌이 들어 주먹을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