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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테이아(4)

  그날도 진의 가게는 북적였다. 해강은 가지각색의 물건을 찾는 손님들을 응대하다가도, 중간 중간 진의 심부름을 다녀와서 과일을 채우고 진열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불쑥 정신을 놓고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지난 몇 주간 연우와 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흘러서 미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신연우 생각은 그만하고 일에나 집중하자. 해강은 북적이는 가게를 돌아보며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마침 가게에 들어와 진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신사를 발견했다.  


  “전에 찾으시던 거 맞죠?”


  해강이 신사에게 와인을 내밀며 말했다. 그는 얼마 전 가게에서 와인을 찾았던 손님이었다.


  “오! 어디서도 구하기 힘들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이곳저곳 떠돌다 보면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더군요.”

  “다행이네요. 저희 가게 찬장 깊숙이 있더라고요.”


  와인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신사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해강을 향해 덧붙였다.


  “참, 클리어워터 레이크라는 마을에서 오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해강은 몇 년 만에 듣는 익숙한 이름에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진이 갑자기 휘파람을 부며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범인은 그였다. 지치지도 않고 물어대는 통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해강이 진을 밉지 않게 흘겨본 후 신사를 바라봤다.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곳 출신 하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더군요.”

  “…폭동이요?”

  “테이아에서는 굉장히 먼 곳이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고요. 입소문으로만 들었지 정말로 존재하는 마을이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폭동의 규모가 꽤 큰지 여러 사람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어요.”

  “그래, 맞다. 클리어워터 레이크!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거기가 해강이 네 고향이었어?”


  진이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었다. 해강은 가게 창틀에 기대어 떠들고 있는 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폭동, 약탈, 방화, 주동자, 그리고 클리어워터 레이크. 그들이 내뱉는 알 수 없는,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단어들. 해강은 불길한 예감에 한달음에 다가가 신문을 뺏어 들었다. 이윽고 신문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그 위로 눈물 자욱이 번졌다. 신문을 빼앗긴 무리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해강에 입을 다물었고, 진이 해강의 등을 두드렸다. ‘아이고, 아가. 갑자기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해강은 신문 1면에 커다랗게 인쇄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클리어워터 레이크의 하인들, 주인을 살해하고 폭동을 일으키다-

  -왕국 근위대, 크레이터 폭동 성공적 진압. 주동자 사형 확정-


  사암으로 지은 거대한 아치문 앞에 모여든 군중들과, 한재윤. 재윤이 선두에 서서 하늘을 향해 한쪽 팔을 곧게 뻗어 올리고 있었다.


  “얼굴만 보고 올게, 어?”

  “안 돼.”


  연우가 굳은 얼굴로 해강을 외면했다. 해강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진의 외침을 뒤로하고, 신문지를 쥐고 정신없이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글을 쓰고 있던 연우는 눈물로 젖은 해강의 얼굴을 발견하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강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클리어워터 레이크, 한재윤, 폭동… 해강의 말을 듣는 내내 연우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다짜고짜 거길 어떻게 가겠다는 거야. 해강아, 크레이터는 테이아와는 달라. 하루가 멀다 하고 범죄가 일어나는 무법지대라고 들었어. 위험할거야.”

  “폭동이니, 주동자니. 나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확실한 건, 한재윤이 곧 죽을 거라는 거야. 연우야, 말이 안 되잖아. 박이 죽은 건, 그 사람이 너무 많은 사람을 고통에 밀어 넣었기 때문인데…”


  말끝을 흐린 해강이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자, 연우는 문득 해강을 황무지에서 처음 발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연우가 해강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주해강, 나 좀 봐. 숨 쉬어 봐.”


  해강은 영문도 모른 채 박에게 끌려가야했던 끔찍한 그 날의 밤이 떠오를 때마다 숨이 막히곤 했다. 차단된 시야 너머,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만 때려야 한다며 비열하게 웃던 박의 목소리. 그리고 가차 없이 날아들던 발길질. 재윤이 박의 목을 조르고, 박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재생되었다.


  “연우야 나, 크레이터로 가야겠어.”


  연우가 땀에 젖은 해강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해강의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해강아, 나에겐 너밖에 없는 것처럼, 너도 다른 건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넌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모를 거야.’ 연우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 대신 한숨을 뱉었다. 해강과 함께하고 싶은 만큼 그에게 하지 못한 말은 속절없이 쌓여만 갔다. 난 대체 언제쯤 너에게 솔직해 질 수 있을까. 


  “…혼자는 안 돼. 같이 가자.”


  해강이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연우를 와락 껴안았다. 연우는 해강의 등을 토닥이며 바닥에 활짝 펼쳐진 신문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결연한 표정의 재윤과 산.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기분 나쁜 예감이 피어올랐지만, 지금 이 순간은 품안의 체온을 마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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