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내게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주 생생한 꿈. 누군가 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또 어느 날의 꿈속에서 나는 얇은 천에 의지한 채 허공을 날아올랐고, 붉은 머리 아이와 미로 같은 복도를 걸으며 숨죽여 웃기도 했다. 여기는 어디지?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목소리를 지닌 저 아이는 내가 맞나? 하지만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신연우의 얼굴을 한 남자였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새벽의 끝자락에 눈을 뜨면, 눈앞에 닥친 현실이 참을 수 없이 한심했다. 거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 꿈속의 주해강은 곧잘 웃던 아이였던 것 같은데. 거울 속의 비친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는 자잘한 실수를 반복했다. 주해강씨. 곧 업무 평가 시즌인거 알죠? 정신 차립시다.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군기가 빠져가지곤…. 이래서 계약직은 못 쓴다니까.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만 울리는 사무실 가운데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팀장의 질책을 견뎌야만 했다. 자리로 돌아온 나를 바라보는 지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메신저 창이 깜빡였지만, 답장하지 못했다. 빈 워드창의 커서가 깜빡거렸다.
문득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희망 직업, 장래 희망 따위를 작성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는 빈칸으로 제출하거나 친구의 답을 성의 없이 베껴 채워놓곤 하는 학생이었다. 항상 궁금했다. 어떻게 다른 아이들은 무언가가 되고 싶고, 내일을 저토록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을까. 희망이니 장래니, 죄다 한가한 소리로 들렸다. 눈앞에 놓인 막막한 현실 외에는 모든 일이 사치품으로 느껴졌던 때. 훌쩍 커버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해강씨.]
[점심시간에 올 거죠?]
[오늘 몇 시에 끝나요? 같이 저녁 먹어요.]
연달아 핸드폰 진동이 울리자 팀장이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번호 같은 거 알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혼자 테이아를 찾아 간 이후부터 신연우는 툭하면 귀찮게 굴었다. 점심 회식을 마치고 단체로 카페를 찾은 날, 날 발견하곤 주인 만난 대형견마냥 굴어서 당황하게 한다던가. 자영업자가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답 없는 연락을 지치지 않고 해 온다거나.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신연우가 아니라 나였다. 거절하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있은 건 바로 나니까.
그렇게 끝내 지우의 메신저에도, 신연우의 문자에도 답하지 못한 채 불 꺼진 사무실을 나섰다. 능소화가 흐드러진 담장아래 기대어 있던 신연우가 없었다면, 오늘도 그저 그런 날들 중 하루였을 테다. 사소한 불행, 지난한 오늘. 그런 익숙한 시간과 하루. 나를 발견한 신연우가 웃었다. 꿈속의 남자와 똑같은 미소를 지닌 사람. 그가 한달음에 내 앞에 서더니 양 손 가득 무언가를 내밀었다. 분홍빛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였다.
“생일 축하해요.”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네? 아, 그게…”
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신연우를 그대로 두고 지나쳤다. 한적한 버스 정류장은 여름밤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겉옷을 벗으며 땀을 닦는 사람들, 창백한 가로등 아래 열기를 품은 채 숨죽인 가로수. 신연우는 쭈뼛대며 내 옆에 섰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사님, 잠시만요.’ 나는 끝내 그를 외면하지 못했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버스가 도시의 밤거리를 무심히 달린다. 나는 맨 앞자리에, 그는 맨 뒷자리에 앉아 같은 방향을 향해서. 사소한 불행, 지난한 오늘. 그리고 이토록 낯선 파열. 다정하고 무른 것은 손쉽게 균열을 파고든다.
종점에 도착하자 승객은 우리 둘뿐이었다. 기지개를 펴는 기사에게 인사하고 내리자, 이어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굽이진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하늘을 가리는 어지러운 전깃줄과 비좁게 등을 마주한 빨간 벽돌 빌라들,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깨진 화분.
축하해 주고 싶은 날이야 우리가 알아서 정하면 되지. 예를 들면, 가장 행복했던 날로 고르는 거야.
어김없이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털어냈다. 신연우는 어느새 부턴가 속도를 늦추더니 걸음을 멈춘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없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익숙한 빌라 앞에 도착했다. 열기 탓인지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5층을 올라가는 내내 불빛이 반짝였다가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육중한 철문이 닫히자, 불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공간이 익숙하게 나를 맞이했다.
[저녁 맛있게 먹어요. 미안해요.]
나는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다,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얼마나 달렸을까. 신연우는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서자 천천히 고개가 올라왔다.
“신연우씨,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
“저는요. 이런 삶이라도 꾸역꾸역 잘 버텨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자꾸 끼어들어요? 원래 알고 있던 사람인 것 마냥 친근하게 굴어서, 왜 자꾸만 곤란하게 하냐고요.”
“해강씨.”
“내가 드디어 미친 것 같아요. 환청도 들리고, 매일 이상한 꿈도 꿔요. 그게 꼭 신연우씨 목소리 같아서, 꿈속의 내가 꼭 나인 것만 같아서. 모든 게 엉망이에요.”
“해강아.”
환청이 아니었다. 신연우가 아주 익숙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널 기다려왔어.”
그가 천천히 나의 손등에 이마를 기대었다. 한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감촉이었다. 왜 신연우는 나를 바라볼 때마다 저토록 쓸쓸하고 외로운 눈을 하는 걸까. 떨리는 목소리로 토해내는 저 말은 진심일까, 아니면 한숨처럼 흩어질 공허한 단어일 뿐일까.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