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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7. 2024

[해강의 우주] 클리어워터 레이크(8)

  저택은 무자비한 곳이었다. 하인들은 쪽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서커스 연습을 하거나 저택을 청소해야 했고, 때로는 주인을 위한 파티를 준비해야 했다. 박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눈에 띈다면 서재로 불려갔고, 어김없이 죽거나 다쳐서 돌아왔다. 끼니는 형편없었고, 잠자리는 더럽고 비좁았다. 


  연우는 해강과 재윤, 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들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그 날 헛간을 다녀온 후로 몇 주가 지났고, 서커스와 파티가 쉴 새 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연우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틈날 때마다 박에게 불려가 낯선 이들 앞에서 마법을 선보여야 했다. 약에 취해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박을 볼 때마다 꼭두각시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견고한 성에서 이방인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세 사람을 찾아 저택을 돌아다니던 연우 앞으로 갈색 머리통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해강이었다. 연우는 반가운 마음에 해강을 불렀지만, 해강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복도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를 따라간 곳에 수십 명의 하인이 몰려있었다. 박의 서재 앞이었다. 박이 신경질적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한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내동댕이쳤다. 하인들은 공포에 질려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감히 날 거역해?”


  무거운 구둣발이 아이를 짓누르자, 재윤이 털썩 주저앉으며 비명 같은 외침을 내뱉었다. 제발 그만해. 발길질이 이어지려는 찰나, 거침없이 튀어 나간 해강이 아이를 감쌌다. 


  “주해강, 또 너냐?”


  박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해강을 향해 침을 뱉었다. 무자비한 발길질이 시작됐지만, 해강은 신음소리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연우가 나서려는 찰나, 재윤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당신까지 나서면 정말 죽을 거예요.’


  아치형 유리창이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살얼음이 잔뜩 끼어있었다. 박은 발길질을 멈추고 무리를 돌아봤다. 그는 연우를 향해 빙긋 웃더니, 흥미를 잃은 얼굴로 하인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돌처럼 굳어 있던 무리가 빠르게 흩어졌다. 


  절뚝이는 해강을 재윤과 연우가 양쪽에서 부축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를 침대에 뉘이자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해강은 익숙하게 셔츠를 벗었다. 재윤은 울음을 참으며 푸르게 피어난 멍에 약을 발랐다. 해강이 재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장난스럽게 부딪쳤다. ‘울지 마.’ 그런 두 사람을 연우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해강은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졌다. 더러운 담요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해강은 늘 몸을 던지고, 우리는 침묵하죠. 박이 너무 무서우니까요. 그런데요, 사실 모두가 해강이 나서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야 끝이 나니까요.”


  연우는 평온하게 잠든 해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를 보며 나 자신을 떠올린다니, 완전한 오만이었다. 자신은 어린 시절로부터 한 발자국 자라나지 못한 채 과거에 사로잡힌 겁쟁이라면, 해강은 용감하고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해강은 가물어가는 의식 속에 이마에 닿는 차가운 손길을 느꼈다. 그럴 때면 거짓말같이 고통이 사그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해강이 침대 가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차가운 기운을 간직한 연분홍색 꽃이 놓여 있었다.


  해강은 연우의 방문 앞에서 망설이다, 문틈으로 들리는 신음 소리에 문을 열었다. 빈틈없이 커튼을 친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흔들리는 양초 하나만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연우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정신없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의 영향이라도, 그의 몸은 너무나 차가웠다. 핏기를 잃은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뜨겁고 무서워요… 어머니, 제발 그만둬요…’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해강은 안쓰러운 마음에 연우를 가만히 토닥이다, 그를 품에 안았다. 다친 새를 매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다 괜찮아 질 거예요.” 


  나를 위로해 주었던 것처럼, 당신의 고통도 조금은 덜어지기를.


  연우는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호수에 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렌이 자신의 목덜미를 단단히 쥔 채 새된 목소리로 주문을 읊고 있었다. 피 냄새가 진동하고, 검붉은 화염이 덮쳐오던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연우야. 괜찮아. 뜨거운 고통은 사라지고, 차가운 포옹이 이어졌다.


  턱 밑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느껴졌다. 해강은 고른 숨을 고르며 잠들어 있었다. 렌의 동굴에서 달아난 이후, 연우는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려 왔다. 칙술루브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렌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더 자주 들려왔다. 마치 그의 음성이 연우의 영혼을 완전히 잠식한 듯이. 연우는 생애 처음으로 느낀 안온함을 만끽하며, 아이의 몸을 마주 안았다. 


  연우는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찡그렸다. 침대는 텅 비어있었다. 재윤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문 너머로 나직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해강씨는?”

  “헛간이 불타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껏 해온 일들이…”

  “재윤씨, 진정해요. 해강씨는요?”


  연우가 재윤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재윤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해강은 아까부터 보이질 않아요. 방에도 없었어요. 헛간에 있을까요?”

  “일단 헛간으로 가 봐요.”


  두 사람은 헛간을 향해 달렸다.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그곳은, 나무와 동물의 가죽이 타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타오르는 열기 아래서 거대한 불기둥이 헛간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고 있었다. 동물과 나무, 생명과 삶이 재가 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재윤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박이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자밖에 없다. 연우가 주먹을 쥐며 뒤를 돌았다. 저택의 하인들이 모두 모여 타오르는 헛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연우는 무리에 성큼 다가갔다.


  “해강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주해강이라면 새벽에 주인에게 불려갔습니다. 서재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아마 지금쯤 제정신이 아니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연우는 무리를 헤치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의 뒤로 뱀의 혀 같은 붉은 화염이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박은 연우가 오기를 예상이라도 한 듯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연우의 온 몸에서 한 겨울의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서재를 다 얼려버릴 셈인가? 당장 그만두지. 내가 자네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착각하지 말게. 다 쓰임이 있어서 지금까지 참았으니까.”

  “그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주해강, 그놈과 언제 그렇게 애틋한 사이가 됐지? 생명의 은인, 뭐 그런 건가?”

  “그 아이는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때렸으니 안심해. 워낙 자주 맞던 놈이라 그런지 맷집이 아주 세더군. 독한새끼. 소리 한 번 안내고 끝까지 노려보던 게 아주 재밌었지.” 


  연우가 박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박은 연우에게 쏟아져 나오는 냉기에 이가 딱딱 부딪혔다. 유리창에 살얼음이 끼고, 얼음 덩어리가 된 꽃병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참 쓸모없는 능력인데, 귀찮긴 하군. 기어오르는 것도 여기까지다.”


  박은 핏발이 선 연우의 눈을 바라보며 문 쪽을 향해 손짓했다. 사람의 인영이 빠르게 다가왔다. 순간 연우는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듯한 고통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시야가 울렁거렸다. 연우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이의 맨발이 보였다.


  “하하, 제대로 맞췄군. 잘했다. 이은조라고 했나?”


  하인 옷을 입은 자가 연신 박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은조는 자신의 손에 들린 깨진 거울을 바라봤다. 피 묻은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너에게는 특별 포상을 내리지. 헛간은 어떻게 됐지?”

  “말씀하신 대로 태워버렸습니다.”

  “천한 것들이 감히 내 눈을 피해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


  박이 구겨져 있던 셔츠 자락을 털어내며 쓰러져 있는 연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구둣발로 연우의 손가락을 짓이겼다.


  “넌 서커스에서 멍청한 인간들의 지갑이 열릴 만한 잔기술이나 보여줘. 네놈의 그 별 볼일 없는 마법으로 말이지.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주해강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연우는 점점 시야가 아득해졌다. 이상했다. 아무리 큰 상처라도 눈 깜짝할 새에 아물며 아픔은 빠르게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피는 계속해서 흐르고, 고통은 커져만 갔다. 해강을 어서 찾아야 하는데. 


  “아, 중요한 걸 빠뜨렸군.”


  박이 쭈그려 앉아 연우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댔다. 그리고 와인 잔 모양의 헤베의 표식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자랑스레 달고 다니는 렌의 표식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주술사가 내일쯤 클리어워터 레이크에 도착한다고 하더군. 너를 꽤 아끼는지,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걸었다. 서커스가 끝나면 그 마녀에게 보내주지. 네놈의 쓸모는 거기까지다.”


  연우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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