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 서재는 붉은 휘장이 사방을 두르고 있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동상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연우는 마을 사람들의 조악한 목재 집과 핏기 없는 마른 얼굴들을 떠올렸다. 그에 반해 저택은 너무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박에게 다가갈수록 시큼하면서 눅진한 향이 코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온몸에 황금을 두른 채 거만하게 웃고 있었다. 연우는 자신의 삶을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던 탐욕스러운 이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박은 교활하고 야망이 큰 인간이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그는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을 눈속임 마술로 현혹하여 닥치는 대로 돈을 쓸어 모았으며, 어렵지 않게 클리어워터 레이크의 폭군으로 군림했다. 박의 저택에선 매일 같이 영문 모를 살인과 난잡한 파티가 난무했으나, 마을의 제일 가는 부자이자 영주인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박은 연우와 악수를 나누며 외지인의 구석구석을 훑어 내렸다.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으나 옷차림은 값비쌌고, 행동거지는 상류 사회의 매너에 익숙해 보였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이상하리만치 여유가 넘쳤다. 전혀 긴장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입을 씰룩이던 박이 돌연 눈을 빛냈다.
‘헤베의 표식! 렌의 종놈이군… 이놈은 진짜다.’
연우의 목덜미에 새끼손톱만한 와인 잔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박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지난 몇 년간 이곳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무지의 모래 바람은 모든 걸 삼켜버리니까. 아무리 당신이 마법사라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어디에서 왔지?”
연우는 티 나지 않게 눈썹을 들썩였다.
“한갓 마술로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습니다.”
“비밀이 많군. 뭐, 좋아. 이곳 주민들은 마법이라면 환장하는 치들이니, 당신이 돌멩이 하나만 얼려도 개미떼마냥 몰려들 거야. 듣자하니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하던데, 최소한의 밥값은 해줘야겠어.”
박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연우는 서재로 오는 길에 마주쳤던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든 생기를 빼앗긴 표정으로 분주히 움직이다가도, 낯선 자신과 마주할 때면 겁에 질려 몸을 숨겼다. 박의 저택과 어린 하인들. 이곳은, 렌의 동굴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서커스는 일주일에 한 번 열린다. 수천 명의 주민이 서커스를 보러 저택으로 몰려들지. 그래, 피날레에 당신의 그 대단한 마법을 사용해 보는 건 어때? 타오르는 대지 위의 얼음이라, 아주 재밌겠어.”
“서커스?”
“우선 내일 당장 열리는 쇼를 보는 것이 좋겠군. 당신이 돈을 번다면, 나는 그에 상응하는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지.”
연우는 박의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의 뒤로 거대한 독수리가 벌거벗은 소년을 껴안고 날아가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참, 당신이 주해강을 구했다고? 쓸데없는 일을 했어. 그놈은 저택의 골칫거리거든. 물론 참 재밌는 캐릭터긴 한데 말이야…. 스스로 굴복해서 사라지는 꼴이 나쁘지 않았거든.”
돌연 서재 안에 한기가 돌았다. 연우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박차고 나섰다. 곧이어 박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는 굵은 손마디를 뚝뚝 꺾으며 말했다.
“칙술루브의 렌이라는 주술사에게 전갈을 넣어. 클리어워터 레이크에 당신의 쥐새끼가 숨어 들어왔다고.”
서재를 나선 연우는 자신의 소매를 잡는 손길을 느꼈다. 연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해강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해강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복도를 향해 걸었다. 해강이 어찌나 살금살금 걷는지, 연우 또한 그를 따라 발꿈치를 들었다. 복도는 마치 미로 같아서 저택이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번쩍이는 앤틱 가구들과 눈을 부릅뜬 동물 박제품을 차례로 지나자, 점점 어둡고 비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마침내 두 사람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이 천장을 향해 얼기설기 솟아오른 공간에 도착했다.
“여기는 어디죠?
연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사위를 둘러봤다. 층마다 방이 있었다. 어둡고 습한 공간을 밝혀 주는 건 깜빡이는 전구 하나뿐이었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지내는 곳이에요.”
“…여기서요?”
해강은 숨을 몰아쉬며 땀을 훔쳐냈다. 연우는 멀쩡했다. 아파보이지도 않고,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박이 이 자를 멀쩡하게 살려뒀다고?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어쨌든 자신을 살려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강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거대한 석상 뒤에 숨어 서재 문을 노려보자 하인들이 고개를 저으며 지나쳤다.
그때 해강은 볼에 닿는 차디 찬 감촉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연우가 머쓱한 얼굴로 허공에 뜬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이는 연약해 보였고, 불안해 보였다. 연우는 그런 해강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렌의 앞에서 무기력하게 떨던 자신을.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렌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을 뻗어 뺨에 얹어 주곤 했다. 연우는 렌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절망스러웠다.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제 손을 늘 차갑거든요. 너무 더워보여서요.”
해강은 자신보다 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연우를 보며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전 당신이 당장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박은 무자비한 사람이거든요. 당신의 마법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 사람, 확실히 기분 나쁜 사람이었어요. 서커스에 참가하라고 하더군요. 정확히 그게 뭐죠? 마법쇼 같은 건가요?”
서커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해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서커스는 저 경기장에서 열려요.”
해강이 비좁은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번쩍이는 빛에 휩싸여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아이들이 완벽한 군무에 맞춰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고 있었다.
“우리는 저택에서 일을 하는 하인이기도 하지만 서커스의 단원이기도 하죠. 박은 고아나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혹독한 훈련을 시켜요. 저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춤을 추고, 줄을 타는 법을 배웠어요.”
연우가 눈썹을 찡그렸다. 씁쓸해 보이는 해강의 얼굴에 연우가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해강, 너 진짜 나 간 떨어지게 자꾸 사라질래?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하던가!”
재윤의 얼굴이 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연우가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도대체 이 미로 같은 저택에서는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용케도 살아남았네요?”
재윤이 한숨을 쉬며 다가오는 해강을 밉지 않게 노려보다 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자, 재윤이 웃으며 지하로 사라졌다. 연우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해강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그때, 그냥 가라고 했어요?”
해강이 멈칫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도 그저 평범한 날들 중 하루였어요. 한 사람이 죽었고, 박은 구둣발로 그 몸을 걷어차며 말했죠. 버리라고. 산과 함께 그 아이를 황무지에 놓아주고 오는 길에, 문득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다예요.”
해강이 연우를 바라봤다. 위태롭게 깜빡이던 전구가 켜졌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먼지가 눈처럼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고, 그제야 연우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해강은 그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