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8
일본 키비츠
일본 오카야마 현의 키비츠는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입니다. 오래된 전차를 타고 도착한 키비츠 역은 옛날 영화에서만 보던 오래된 역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그 시절을 잘 알지 못함에도 뭔가 뭉클한 느낌까지 나기도 했습니다.
전차길을 따라서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키 작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색색깔의 꽃과 작은 날벌레들이 유난히도 많았던 동네. 키비츠 신사로 가는 길, 동네를 빙 둘러싼 완만한 산들과 넓게 펼쳐진 평원은 한적해 보였지만,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미를 자랑하는 400m의 긴 화랑은 키비츠 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조용한 신사를 천천히 둘러보다 발견한 회랑. 사진기를 꺼내 들고 그곳을 거닐었습니다.
'신사를 떠도는 남자'는 작은 카메라를 목에 메고 회랑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손짓을 하며 '굿 카메라'라고 외쳤습니다. 남자에게 다가가니 그가 서 있던 곳이 회랑의 아름다운 건축 구조가 한눈에 보이던 곳이더군요. 저는 남자에게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말했습니다.
남자는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쯤으로 보였고, 듬성듬성 난 검은 머리카락은 애써 빗어 내린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왜소하고 작은 체구에 이상하리만치 깨끗한 흰색 츄리닝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래서 어둑한 회랑 안에서 그만이 기이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 짧은 대화를 계기로 남자와 나는 회랑을 함께 거닐었습니다. '웨얼 아 유 프롬'이라고 묻는 남자에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남자는 반색하며 서울에서 왔냐고 물었습니다. 그 후에도 남자는 서툰 발음으로 영어 단어를 던졌고, 저는 상대방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도 잊은 채 신나서 대답을 늘어놓았습니다. 홀로 조용한 도시를 여행하는 것에 지쳐있을 때였거든요.
회랑 중간중간 산으로 이어지는 돌길이 있었는데, 그곳을 올라서면 야트막한 숲 속에 작은 신사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연하게도 일본어만 길게 쓰여 있는 안내문에 무심히 눈길을 주면, 남자는 한자를 짚어가며 서툰 영어로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어떤 신사는 임산부들을 위한 곳이었고, 어떤 신사는 키비츠 산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사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어로 신이 '카미사마'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자, 남자는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쳤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나의 두서없는 말들에도 상냥하게 웃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참 친절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남자는 알아 들었는지,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기도 했습니다.
회랑에서 이어지는 길 중엔 '오카마덴'으로 이어지는 곳도 있었습니다. 일본 귀신의 모델이 된 '우라'의 목이 묻혀 있다는 낡고 오래된 신사였습니다. 돌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런지,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땀에 흘러내리는 은빛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신사를 구경하고 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신발을 벗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신사 안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신사 안에는 그곳을 관장하는 듯한 관리인 여자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소박한 신사를 빙 둘러보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여자는 손짓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저 남자를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더군요.
실상은 이랬습니다. 며칠 전에도 여자는 남자를 목격했습니다. 그때도 남자는 카메라를 멘 관광객과 함께였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그 사람이 '한국인' 여자가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한국인이고 그녀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녀는 친구가 보고 싶다고 잠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남자는 신사를 방문한 이들 중 한 명을 골라 신사 곳곳을 설명해주었고,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의 차에 태워 어디론가 이동했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이 곳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며,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습니다.
차가운 다다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무섭기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슬픈 마음이 커졌습니다.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다르지만 좋은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들뜬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았습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注意(주의)'라고 적어주곤, 부적이니 잘 간직하라며 웃었습니다. 이제 자신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도 덧붙이면서요.
여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신사를 나섰습니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었습니다. 저를 발견하고 웃어 보이는 남자의 웃음에 저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즐겨 보던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무녀 캐릭터가 떠올랐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다시 키비츠 신사를 방문한다면, 그때도 오카마덴을 고요히 지키고 있을 것 같은 여자.
남자는 여자를 슬쩍 쳐다보고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릴 뿐이었죠. 엉뚱한 대화의 맥락들이 이어지던 찰나 저는 숙소로 돌아가야겠다고 운을 뗐습니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핸들을 돌리는 시늉을 하며 '드라이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남자의 이마 어디쯤을 쳐다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습니다. 빛을 등지고선 남자의 얼굴엔 까만 검버섯이 잔뜩 피어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외치고 등을 돌렸습니다. 고결해 보이던 회랑이 어찌나 무섭고 차가운 곳으로 변해있던지, 오카마덴에 목이 묻힌 우라의 혼이 등 뒤를 졸졸 따라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칠까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키비츠 신사를 빠져나왔습니다.
키비츠 역에서 오카야마 역으로 돌아오던 전철 안, 덜컹거리며 달리는 전차의 불안정함 틈에서 숨을 내쉬었습니다.
남자는 아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몇 가닥 없는 머리를 고르게 정돈하고, 깨끗이 세탁한 츄리닝을 입고 출근하듯 키비츠 신사를 들를지도 모릅니다. 카메라는 꼭 잊지 않게 챙기고요. 긴 회랑을 조용히 걸으며 눈을 굴리는 남자, 안경테를 추켜 올리는 남자,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는 남자, 신사를 떠도는 남자.
신사를 떠도는 남자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는 상냥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너무도 외로운 사람이어서 그곳을 떠돌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동시에 우라의 혼이 지배하는 키비츠 신사를요.
그게 아니라면, 남자는 산에 살고 있는 귀기가 붙어버린 존재였을까요? 어느 쪽이 되었든 그는 영원히 외로운 채로 신사를 떠돌 것이고, 키비츠 신사의 가장 깊숙하고 허름한 곳 오카마덴을 관장하는 여자는 유심히 그를 주시하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