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이름으로 부르는 습관
사람들은 대개 틀리기 위해 틀리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을 고르기 위해 틀린다.
추수감사절 파티는 일본인 가족의 집에서 열렸다.
일본, 캐나다와 홍콩 출신 인도, 네팔 그리고 한국 출신의 네 가정이 모였다.
팟럭이었고, 각자 음식을 하나씩 가져왔다.
나는 김밥을 준비했다.
밥을 펴고, 속을 올리고, 말아 자르는 동안
이 음식이 나를 설명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오래 반복해 온 손의 기억을 따랐을 뿐이다.
김밥이 식탁 위에 놓이자
누군가 말했다.
“스시네.”
나는 웃으며 정정했다.
“김밥이에요.”
그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작은 방향 수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다시 스시라고 불렀다.
김밥은 맛있었고,
그 사실은 이름보다 중요해 보였다.
인간은 새로운 개념을 만날 때
완전히 새 언어를 배우기보다
기존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다.
그 편이 훨씬 덜 피곤하기 때문이다.
스시는 이미 알고 있는 단어였고,
김밥은 아직 그렇지 않았다.
같은 날,
식탁에서는 일본의 기술력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인도 엄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삼성과 LG도 일본 회사 아니냐고.
나는 한국 회사라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정정은 받아들여졌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는 않았다.
정확함은 종종
대화에 필요한 최소 요건을 충족하면
바로 퇴장당한다.
이 장면이 마음에 남는 이유는
누군가가 무례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때
정확함보다 익숙함을 먼저 택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가장 가까운 이름으로
세상을 부르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