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 제주도, 그리고 감포
식민지 시대 감포의 해녀마을을 취재한 사진이 남아 있다. 안경을 쓰고 중절모를 쓴 남자가 젠쇼로 추정된다. 옆에 선 여성들은 조선인 해녀들이다. 젠쇼는 이 부락을 취재하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진-양북면 감포항의 해녀부락(6호)>(출처:젠쇼, 1934)
해녀부락
경상북도에서 강원도 연안에 걸쳐, 제주 해녀가 출어한 자가 대단히 많고, 경주군 내의 감포항도 그 집단생활하는 민가가 몇 가구 있고, 그 외 나정리, 오류리, 선창리에도 해녀의 집단부락이 있다. 그들 중에는 겨울 동안은 향리에 돌아가서 봄이 되면 출가(出稼)하는 자와, 연중 체재하는 자가 있는데, 생활양식은 다른 어민과 다르다. 수년 전까지 감포항에는 도바(鳥羽)의 해녀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시찰한 1931년에는 전부 제주 해녀들 뿐이고, 도바의 해녀는 한 명도 없었다. 당시 경상북도에서는 전복어업을 금지했기 때문에, 해녀는 생활이 궁해져서 그 해금을 당국에 열심히 진정하고 있었다. (젠쇼, 1934:305)
사진 설명에 해녀 가구가 6호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전복과 미역을 채취하러 제주도에서 온 조선인 해녀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거주한 듯하다. 초가집 담벼락에 어머니와 아이들이, 동생을 업은 누이가 렌즈 앞에서 긴장한 표정을 보여준다.
감포는 해녀가 많았는데, 일본에서 물질하러 온 해녀도 있었던 듯하다. 위 글에 있듯이 ‘도바’라는 지역은 현재 일본 미에현(三重県) 이세(伊勢)만 시마반도(志摩半島) 지역이다. 어촌으로 새우, 전복, 해삼 등의 수산물이 많이 난다. 일제 강점기 감포는 가가와 출신이 다수인데, 가가와현보다 훨씬 먼 미에현에서, 어떻게 감포까지 왔는지 흥미롭다.
도바시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해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도바 지역은 현재도 일본 해녀 약 2천 명 중 750명이 있을 정도로 해녀업이 성황인 곳으로, 제주도처럼 해녀박물관을 세우고, 해녀문화의 계승과 보존을 위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한다고 한다. 도바 해녀들은 1890년경부터 조선반도에 물질을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일 간 해녀 교류 역사도 상당한 듯하다. 먼저 제주도를 찍고, 육지 연안으로 상륙했을 것이다.(海の博物館 http://www.umihaku.com/tenji/tokubetu/index.html) 또한 1871년에 나가사키에서 처음 통조림이 만들어진 이후, 시마반도 지역에서는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 성게, 한천 등의 통조림제조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1917년 「조선민보」에 감포에 후쿠이에서 온 어업단과 이세구미(伊勢組)의 통조림공장이 이주했다는 것을 보면, 이세구미는 미에지역에서 이주한 이들이 만든 통조림 공장이라고 추정된다. 1910년대에는 이미 감포에 일본 해녀들이 있었을 것이다. 1923년 미에현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일본인이 6,000명 정도였다.(젠쇼, 1925:53-56)
일본에서 해녀업이 유명한 도바, 이세(伊勢) 지역은 일본 신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천황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세신궁이 있는 곳이다. 일본 천황가를 연 아마테라스 오카미(天照大神)를 숭배하는 곳이다. 따라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세신궁에 해녀들이 딴 귀한 전복을 받쳤다고 한다.
도바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 <바닷소리(潮騒)>의 배경무대이기도 하다. 미시마는 1953년 도바의 어촌을 방문하고, 어민들에 삶에 반하여 이 소설을 창작했다고 한다. 1970년 자위대에서 할복자살로 생을 마쳐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 작가가 드물게 밝고 건강한 인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해녀들의 생명력에 이끌렸던 걸까?
일본의 도바 지역 해녀들은 1930년대에는 이미 감포에 없고, 육지 해안으로 출가 물질을 하러 온 제주 해녀들이 있었다. 1914년에 감포의 제주도 해녀를 찍은 도리이 류조의 사진이 남아 있다.
<사진-경북 경주 감포의 제주도 해녀 1914>(출처: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002301)
제주 해녀들은 150년 동안 지속된 ‘출륙금지령’, 즉 제주 해녀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폐기되고서야 육지로 나가 물질을 했다고 한다. 그것을 출가(出稼) 물질이라 한다. 제주 해녀들은 조선 시대에는 할당된 공물의 양을 채우기 위해 육지로 나갈 수 없었다. 제주 해녀들은 1895년 경상남도에서 처음 출가 물질을 한 이후, 한반도 해안, 일본, 중국,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제주도내 1만여 명 중 5천 명이 출가 물질을 했다 하니, 엄청난 숫자다. 그들은 수산물 채취를 위해 계절노동자로 일시적으로 동남해 연안을 따라 물질을 하고, 때로는 물질하러 간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다. 사진에 있는 감포의 해녀들은 그렇게 정착한 듯하다.
해방 후에도 감포에는 정주하는 해녀들과 제주도에서 철마다 오는 해녀들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 경북 동해안에 와서 물질하던 제주 해녀의 회고담이 남아있다. 경상도에서는 1953년부터 입어권을 놓고 현지 어민들과 제주 해녀 사이에 분쟁이 일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주 해녀들은 5월 1일부터 8월 말일까지 각 공동어장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인원은 양남 70명, 감포 121명, 양포 271명, 구룡포 434명, 대보 166명 등 총 1,070명으로 제한됐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여전히 많은 인원의 제주 해녀들이 동해안의 풍부한 어장을 찾아 계절마다 이동을 한 것이다.
(「이곳 경주 바다는 60년 전 물질하던 어머니를 기억할까?」「서귀포신문」2020.7.6)
‘전복’이라는 해산물은 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감포에서도 전복은 굉장히 귀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감포는 전복, 돌미역, 참가자미가 유명하지 않은가? ‘참전복’이라는 지역특산브랜드도 홍보 중이라 한다.
20세기 ‘감포’라는 공간은 바닷길로 일본에서, 제주도에서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또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감포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나야 했을까?
근대의 해녀는 고대의 설화와 이어진다. 신라 신화에는 박(瓠)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박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 해서 박(朴)씨가 되었다는 전설도 그렇고,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서 호공(瓠公)이라 불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이주민 집단의 존재도 있다. 어느 쪽이든 현재는 보기 어려운 박이 신화의 모티브인데, 신화학자들은 이를 동남아에 공통된 신화라 한다. 흔히 우끼(浮き)라는 일본어로 부르는, 오늘날 해녀들이 사용하는 태왁의 옛 버전이 박이기 때문이다. 속이 빈 박을 물에 뜨는 도구로 사용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한다.(출처: 「호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런 신화는 일제강점기에는 내선일체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식민주의에 의한 인간의 이동, 이주는 해녀들의 역사에도 흐르고 있다.
일본인 여성 작가 모리사키 가즈에는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서는 감포에 대한 언급을 두 번 한다. 1927년에 대구에서 태어난 모리사키는 1938년에 경주에 왔다. 부친이 교장으로 근무한 경주중학교(현 경주고등학교)의 사택에서 ‘경주와 감포 사이에 난 포플러 가로수길을 걸어 경주공립소학교에 통학했다’거나(모리사키,2020:181), 해산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장에 가는 길에 전복이랑 성게를 팔았다며, ‘감포에서 산을 넘어 오는지 아직도 바닷물을 내뿜는다‘며 싱싱한 해산물을 묘사한다. (모리사키,2020: 191) 1933년 개통된 경주-감포간 도로로 추령재를 넘어 감포의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과 성게가 경주 일본인들의 식탁에 올랐던 모양이다. 경감도로의 가로수는 언제 포플러에서 벚나무로 바뀌었을까? 지금은 봄마다 벚나무가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