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금융조합
<사진-감포금융조합> (출처:<대일본직업명세도>)
경주군에는 경주, 경주 동부, 안강, 건천, 감포에 5개 금융조합이 있었다. (젠쇼 에이스케: 504) 그중에서도 감포금융조합은 경주금융조합 보다도 규모가 컸다. 경주금융조합의 대부 총액이 160,891,78원인데, 감포금융조합은 201,000,52원이다. 그 외에도 양남지소와 감포어업조합이 별도로 있는 걸 감안하면, 실제 감포항은 어업으로 벌어들인 일본인들의 부가 막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금융기관별 대부상황(1932년 3월 말)>(출처:젠쇼,1934 표를 간략화)
<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1927-1939년)과 「부산일보」에 실린 감포금융조합에 대한 기사를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정리해 본다. ‘금융조합’은 1907년에 설립된 오늘날의 신용협동조합과 같은 서민금융기관이었다.
감포어업조합과 마찬가지로 감포금융조합은 1922년 9월 1일에 설립되었다. 사장은 정호영, 이사는 스기마치 이치로(杉町一郞)였다. 설립 당시 조합장 정호영은 감포의 조선인 유지였다. 정호영은 정호형의 오기라 생각된다. 1931년 양북면 면장이었다. (<경북시사> 2편, 353)
「부산일보」에는 감포금융조합에 대한 기술이 자주 등장한다. 1922년 설립 후 1927년에는 5년 만에 조합원수 782명, 출자 구좌도 926구좌이니, 상당한 규모이다.
1922년 9월 1일 설립 당시 무용이라 생각했으나, 이사 이하 직원의 분발과 소속 조합원의 자각으로 업적 상승. 현재 직원 5명인데 일손 부족으로 사무소 개축과 직원 증원 요구 상태이다.
조합원수 782명, 출자구좌 926 구좌, 자본금 5,000원, 적립금 5,000원, 차입금 49,000원, 대부금 126.000원, 예금 130,910원, 매개 대부금 35,749원.(1927.12.13)
1927년 기본금 5,000원, 적립금 5,000원이 되었고, 감포금융조합 이사였던 스기마치가 포항금융조합으로 영전하고, 이와나가 슌이치(岩永俊一)가 착임.(1928.5.8)
1929년 자본금 6,300원 적립금 9,260원(사장 정호영, 이사 이와나가)
1931년 자본금 6,000원 적립금 14,000원(이하 동), 1933년 자본금 13,000원 적립금 15,000원(이하 동)
감포금융조합 총대 선거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감포금융조합 총대 선거는 9월 29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조선인의 책동이 맹렬하여 이전 선거보다 기권자가 적고 개표의 결과 다음 제씨가 당선했다.
유권자 231인, 투표자수 129표, 무효 5표
66표-미즈시마(泉(필자주-水의 오기)島乙松) 64표-니시이(西井杉松) 62표—? 판독 불가
60표-마쓰오카(松岡益太郞) 60표-山本小八(야마모토) 60표-박남진(朴南鎭) 차점-59표
(「부산일보」1935.10.03)
감포금융조합은 어업의 호황으로 1933년에 자본금이 2배로 늘어난다. 조합의 운영은 일본인들이 좌지우지한 듯하다. 일본인들이 지배하는 금융조합 내에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대립이 있어, 조선인들이 조직적으로 총대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결과 유일하게 조선인 박남진이 총대에 당선된 듯하다.(박남진은 1946.1.25-1946.3.27까지 감포읍장을 역임했다. (<경주시사 1편>, 515, 1940년 2월 20일 자 「부산일보」 에 모모이(挑井)로 창씨개명했다고 실려 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는 이토 테쓰마(伊藤哲魔)」가 이사, 중역을 맡았다. (「부산일보」1936.06.03) 감포금융조합은 본점과 양남에 분소가 있었다. 조합장은 계속 조선인 정호영이 맡고 있으나, 내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권을 두고 알력이 있고, 실권은 일본인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