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의 최대 일본인 집단은 가가와현

가가와현에서 온 마쓰오카

by 뚜벅이


젠쇼 에이스케의 조사에 따르면, 1931년 경주군내 일본인이 2만여 명이고, 그중 최다 현 출신은 477명으로 가가와현이었다. 당시 감포가 포함된 양북면의 일본인 인구는 918명이었다. 대부분은 감포의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33년 <부산일보>에 실린 ‘감포 가가와현인 총회’기사에는 총회에 87명을 참석했다고 했으니, 감포 일본인 인구의 약 10%에 해당된다. 총회에는 세대를 대표하는 대표자만 가입되었다 하더라도, 가족까지 포함하면, 감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가가와현 출신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가와현은 구룡포와 감포에 많은 집단이민, 즉 식민(植民)을 목적으로 어민들을 방출한 지역이다.


감포의 가가와현 출신 중심 인물이 마쓰오카 마스타로였다.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는 감포 신사 옆에 크게 ‘수산업 마쓰오카’ 광고가 있다. 광고의 크기로 보아 유력 일본인 중의 한 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감포 육거리 약국 언저리 위치에 해당되는 자리, 도이구치 저택 바로 옆에 광고의 주인 마쓰오카 마스타로(松岡益太郎)의 사무실이 있었다.


<사진-<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 발췌

화면 캡처 2025-06-19 165145.jpg


마쓰오카는 시코쿠(四國) 가가와현 오카와군 출신이다. 가가와현은 구룡포와 감포에 많은 집단이민, 즉 식민(植民)을 목적으로 어민들을 방출한 지역이다. 감포의 가가와현 출신 중심 인물이 바로 마쓰오카였다.


마쓰오카 마스타로

가가와현 출어단 출신으로, 가가와현 오카와군 야마다촌(香川縣大川郡山田村)이 원적이다.

경력 및 활동 - 전라남도 및 충청남도 연안에서 출어한 것을 시작으로 원양어업에 종사하여 1935년 현재에 이름. 감포항의 방파제 완성에 많은 노력을 하였고, 어업조합 평의원으로서 수산업의 발달·향상에 노력함. 어업의 개량 노력에 대해 도지사로부터 표창을 받음.

인물평 외모 - 경상북도 내 수산업계의 우두머리로서 조선수산업의 발달에 애를 써서 많은 공적을 남김. 천성이 온순한 인물. (<조선공로자명감>,305)


마쓰오카는 도이구치와 마찬가지로 초기 식민자 1세대로, 감포의 모든 이권에 손을 댔다. 어업에서 선어 운반자로, 1926년도부터는 ‘감포 전기’의 중역이었고, 1937년에는 감포온산업의 이사였다. 그러나 도이구치와 달리 어업과 경제적 활동 외 다른 부분에 대한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의 식민이주어촌 건설에 가가와현 출신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883년 가가와현 오카와군(大川郡) 쓰다정(津田町), 기타야마 및 시토초의 오다촌(小田村) 출어자가 중심이 되어 ‘가가와현 원양어업조합’을 조직하여, 일찍부터 조선 연안에서 어업을 했다. 1897년 무렵에는 가가와현 어민들이 ‘가가와현 한국면어업조합’을 설립했고, 조선해 출어자는 모두 원양어업조합에 가입했다. 가입자 1700여 명 중 1500여 명이 오카와군 출신이고, 이 중 9할이 쓰다정와 오다촌 출신이었다. 오다촌의 마쓰오카 사키치(松岡佐吉)가 1883년에 삼치 유망어구를 들고 부산 근해에서 어획했고, 또 쓰다정의 가야노(萱野熊吉)와 와다(和田半兵衛)가 1880년대부터 부산 근해에서 어획을 하였다. (장수호, 2011:49, 박정석, 2017:70-71)


가가와현 출어단은 여수 거문도를 시작으로 동해안 방어진, 감포, 구룡포로 북상했다. 1912년 ‘가가와현 조선해 출어단’을 조직하여 가가와현이 현비를 보조하였고, 주요 어업근거지인 구룡포, 감포, 장승포, 사량도, 나로도에 출장소, 방어진에 지소를 두었다. 가가와현 정부도 정력적으로 식민이주어촌 건설을 지원했던 것이다. (여박동, 525) 감포는 ‘가가와현 출어단’의 주요 어업근거지로 가가와현 출신 어민들이 많았던 이유이다.마쓰오카는 ‘가가와현 출어단’을 이끌고 감포에 왔다. 마쓰오카가 ‘원양어업’을 했다는 것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와서 어업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선어 운반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다쓰노가 이끈 ‘후쿠이현 어업단’은 조금 늦게 1917년에 이주했다.(요시다, 2020:)


각 현의 출어단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감포에서 가까운 규슈나 야마구치의 어민들이 아니라 비교적 거리가 있는 세토내해에 있는 가가와현, 도쿠시마현의 어촌에서 많이 이주했다는 점이다. 오사카에서 규슈로 이어지는 세토내해는 천혜의 어장이지만, 일본 어민들의 남획으로 어자원이 고갈되어, 가가와나 도쿠시마의 어민들은 빈곤 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탈출구가 감포를 비롯한 조선의 바다였다. 즉 식민지 조선은 일본 각지의 가난한 영세어촌의 이주지로, 조선에서의 어로는 빈한한 일본의 어촌을 살찌웠다. 1919년 가가와현 오카와군 오다촌의 총 어업자 1200명 중, 조선해 출어자가 450명, 오다촌 경제의 8, 9할이 출어자 수입으로 유지되었다. (여박동, 2001:526)


가가와현 오다촌 출신 어민들이 구룡포나 감포의 일본인 마을 형성의 주역이었다. 오다촌 출신의 오다구미(小田組)는 조선 연안 최대 운반업 선단으로 융성했지만, 1910년 경계로 하야시가네구미에게 밀려, 해산되었다. 이후 기존 오다구미 멤버들과 마쓰오카 쇼이치(松岡庄一) 등이 마루로쿠구미(丸六組)를 만들어 선어 운반업을 개시하여, 감포를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사업 부진으로 1929년에 다시 해산하였다고 한다. (여박동, 527) 감포에서 ‘마루로쿠구미’의 활동에 대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가가와현 출신 일본인들이 감포, 구룡포를 중심으로 경북 고등어 어업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여박동, 2001:530) 「신라고도 경주지」(1920)의 광고란에 포항에 본점을 둔 운송업체 마루로쿠구미가 안강, 경주, 대구에 지점을 두고, '조선철도주식회사 승인점. 포항-영덕산 자동차 전속취급점, 해륙화물, 연락운송, 신속, 확실, 안전보험'이라고 광고가 실린 것을 보면, 선어운반과 육상교통운반사업도 전개한 듯하다.


감포에서 가가와현 출신들은 ‘가가와현인회’라고 하는 동향 출신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친목과 교류를 도모하였는데, 상당한 숫자에 달했다. 1933년 2월 16일자 「부산일보」에는 ‘감포 가가와현인 총회’기사가 실려 있다.


감포 재주 가가와현인 총회는 11일의 기원절(주:1872년 진무천황의 즉위일을 기념하는 경축일로 2월11일)을 기해서 오후 1시부터 명월관(明月館)에서 개최되었는데, 회원 총수 87 명 중 77명이 출석, 회장 마쓰오카 마스타로씨는 개회인사를 하고 사항 보고 및 자문을 끝내고, 임원을 다시 선출하고, 오후 4시에 종료. 이어서 간단한 연회를 열어 크게 친목을 도모하였다. 일단 해산하고 오후 7시부터 회원 가족의 위안 활동사진을 거행하여 대단히 성황리에 오후 11시 30분에 종료했다. 또한 다시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마쓰오카 마스타로

부회장 도미타 로쿠노신

간사 오다 도메키치, 마쓰오카 세이치, 마쓰오카 산로

평의원 사카모토 아사키치, 무레 사이이치로, 기시이 반지로, 이누후세 나오타로, 기우치 키쿠조, 다케우치 마타키치, 노자키 요시조, 아키토모 나카스케 (「부산일보」1933.2.16.)


가가와현인회 소속 면면들은 1930년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도 확인된다. 회장 마쓰오카 마스타로를 비롯해서, 식료품잡화상 마쓰오카 세이치, 선어상으로 송대곶 유원지 사업을 한 오다, 어업의 사카모토와 기우치, 아키토모 상점 등이다.


기사에 보듯 ‘감포 가가와현인 총회원’이 87명이니, 감포 일본인 인구의 약 10%이다. 총회에는 세대를 대표하는 대표자만 가입되었다고 하더라도, ‘활동사진’, 즉 영화를 본 가족까지 포함하면, 감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가가와현 출신이 상당한 숫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지역의 친인척이 통째로 바다를 건너 집단이주한 것은 동척(동양척식회사)주도로 진행된 농촌의 집단이주와 다를 바가 없는, 식민의 한 형태라고 할 것이다.


<참고자료>

박정석 「식민 이주어촌의 흔적과 기억」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7.

여박동 「근대 가가와현 (香川縣) 어민의 조선해 어업관계」 <일본학보> 47, 2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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