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도메키치와 송대곶 유원지
감포는 일본인들의 식민이주어촌으로 확장되면서, 경주와 이어진 생활권으로서 관광지로도 개발이 시작된다. 특히 1933년에는 경주-감포 간 3등 도로가 개통되고, 같은 해 5월에는 '송대곶 유원지', 11월에는 '송대말 등대'가 준공되어, 경주권 관광루트의 하나로 편입된다. 신라의 고도로서 홍보되고 여행객, 수학여행단이 늘어나는 경주의 관광화에 맞추어, 발 빠르게 철도와 경감도로를 이용해서 감포까지 그 발길을 이으려고 한 것이다. 이 흐름에 올라탄 이가 오다 도메키치다.
감포의 송대말 등대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등대가 있는 송대말은 경관이 빼어나 조선총독부 우정국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감포 송대말(日の昇る甘浦の松臺末)’이라 명명하고 기념우표 및 엽서를 발행했다고 한다. (「2020년 개항 100주년 맞는 감포항 개항사」「경주신문」2017.1.19)
송대말 등대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조선총독부관보」(1933.11.09.)에 따르면, 총독부고시 제553호로 ‘감포어업조합에서 송대말 등대에 등간을 건설하여 1933년 11월 21일에 점등한다고 도지사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등대의 위치는 북위 35도 48분 30초, 동경 129도 30분 48초, 도색 및 구조, 수면에서 퍼져나가는 거리가 통상 25미터, 촉광수 200으로 빛이 도달하는 거리(광달거리)는 맑은 밤하늘에서 5리이고, 상설 간수원(看守員)은 두지 않았다. 1914년 지도에는 송대말과 현재 남방파제 근처에 암석이 다수 표시되어 있는데, 감포항에 드나드는 선박이 증가하면서 조난 방지를 위해 등대가 건설되었다.
송대말등대와 함께 개발된 곳이 '송대곶 유원지'였다. 1933년 5월 18일 자 「부산일보」에는 대대적인 '송대곶 유원지' 홍보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다. 등대 점등식이 1933년 11월 21일이니, 그보다 앞서 유원지가 먼저 완성된 듯하다. 아래 사진이 그 전경이다. 소나무와 기암괴석 사이에 돌다리와 정자가 있고, 사진 앞쪽에 보이지 않지만, 바닷속에 만든 인공수조가 있고, 오른편에 중절모를 쓴 한 남성이 멀리 바다를 보는 시선을 하고 있다. 등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사진: 개원 당시 송대곶 유원지>(「부산일보」1933.5.18)
「송대곶 유원지」
풍광명미 송대곶유원지
감포유일의 낙원
근일 성대한 개원식 거행
감포 오다 도메키치가 경영하는 감포 북단 풍광 명미한 송대곶 유원지는 작년(1932년-필자주) 8월 2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유원지용으로 해면점유허기를 얻어 동시에 공사착수, 금년 5월 오다 도메키치(留吉)가 거액의 재산을 투자하여 바야흐로 완성되어 5월 21일 개원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오백수십 평의 바닷속에 돌출한 기암진석 흡사 일본팔경의 하나인 도사(土佐) 무로도곶(室戶岬) 같은 암벽과 수 만평으로 보이는 멀고 얕은 조개잡이 겸 해수욕장의 적지를 가지고, 배후는 울창한 송림으로 어린 갈대가 푸르고, 망망한 일본해의 대해원과 동양 제일의 고등어 어장인 동해안의 어로에 종사하는 수천 수백 기선의 용감한 조업상태를 손에 쥐듯 내려다보는 통쾌함도 도저히 내지의 긴잔(金山) 등지의 도미(鯛) 망 견학에 비교되지 않는다.
수족관
동 유원지 내에 암석과 암석 사이의 용수를 잘 막아 천연자연의 일대 수족관을 만들어 가장 깊은 것은 1장(丈. 필자주:약 3미터)에서, 2,3척(1척-약 30cm)에 이르기까지 수 개소를 만들어 깊이에 맞추어 도미, 실꼬리돔, 방어, 감성돔 등의 심해 서식의 대어부터 넙치, 갯장어, 쥐치, 볼락, 베로 등의 회유어종, 굴, 백합, 전복 등 조개류에 이르기까지 살려 일반 관람용으로 제공하고, 수학여행 학생들에게는 교재의 일환이라는 의의를 보여준다.
조개잡이와 해수욕
본원의 북측은 만평의 얕은 바다로 그 사이에 천자만태의 대소암석 산재하고 남녀노소의 해수욕장으로서 가장 안전한 이상적인 장소임과 동시에, 다슬기, 소라, 백합조개 등 조개류 다수 부착되어 있어, 부녀자의 놀이터로서도 역시 최적의 장소이며, 육상 모래벌에는 진기한 패석(貝石)이 충만하여 자녀를 위해 더할 나위 없는 오락장소이다. 거북이잡이 및 풍파가 칠 때를 대비하여 육상 테이블 등이 설비되어 있다. (「부산일보」1933.5.18.)
<부산일보>는 송대말 유원지를 ‘감포 유일의 낙원’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오다 도메키치가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약 1년에 걸쳐, 유원지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감포의 천연 자연자원인 송림과 기암괴석과 모래사장의 해안, 다양한 어족자원이 풍부한 어장으로서의 명망 등을 활용하여 해수욕장을 갖춘 근대적 유원지를 목표로 한 듯하다.
그 모델은 도사의 무로토곶이다. 무로토곶은 현재 고치현(高知縣) 무로토곶인데, 개발자 오다는 가가와현 출신이다. 가카와의 남쪽 반도로 튀어나온 지점이 무로토곶이니, 시코쿠인들에게는 익숙한 장소이다. 무로토곶은 1927년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와 도쿄니치니치신문사가 주최하고 철도성이 후원한 조사에서 일본 제일의 해안으로 선정되어 「신일본팔경」으로 선정된 곳이다. 사진을 보면 송대곶 유원지 인공수족관과 유사한 풍경이다. 감포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송대곶을 신일본팔경의 하나인 ’무로토곶‘과 비교하여, 감포의 자연과 아름다움을 '낙원'으로 선전하였다.
<사진-고치현 무로토곶>(출처:土佐史談会hp)
또 기자가 예로 드는 긴잔은 시마네현 이시미긴잔(島根県 石見銀山) 오타(大田) 항의 도미어업을 가리키는 듯하다. 일본의 유수한 관광지나 항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식민지 일본인들의 본토와 비교의식이 엿보인다.
다음으로 '수족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독특한 자연암석을 활용하여 콘크리트로 만든 인공수조는 다양한 어족자원의 견학용뿐 아니라, 송대에 있던 여관과 요정에 공급하는 해산물의 저장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무로토곶의 해안 풍경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다 도메키치(小田留吉)는 감포의 일본인 유력자 중의 한 명인데, 1933년 ‘감포재주가가와현인회’ 간사를 역임하고, 1940년에는 경방단장(警防團長)도 했다. 가가와현 출신으로, <대일본직업별명세도> 혼초 2정목에 ‘오다 도메키치 상점’이 있는데, 선어업을 한다고 되어 있다. 1939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는 도이구치가 대표인 감포온산업(주)의 감사, 1938년에는 나진수산흥업(주)의 감사도 맡고 있다. 경방단은 소방조가 해체되고 전쟁시기인 1939년에 조직된 재해와 공습에 대비하는 조직이었다.
<사진-현재 감포 인공수족관 흔적과 송대말 등대>
'송대말 유원지' 북쪽 해변 암석이 많은 얕은 해안가를 해수욕장으로 개발하였다. 감포의 해수욕장은 수심이 깊고, 파도가 거세서 부산이나 강릉 같은 넓은 모래사장이 아니라, 모래사장과 동해의 거친 파도를 막는 암초 사이의 좁은 해안에서 즐기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니 암초 사이에서 발견한 조개잡이가 중요한 놀이가 되었다.
1933.5.19. 일자 「부산일보」에도 대대적인 홍보기사와 사진이 실려있다.
유원지 주인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지방발전을 위한 공공적 사업으로, 유원지 안에 연회 등에 이용할 시에 무상으로 장소를 제공하고 고객의 희망에 따라 수족관의 살아있는 선어를 이용해서 희망에 부응하는 등 준비하였다. 음료 제공, 기념품 등에 이르기까지 전부 주인이 직접 박리주의로 거의 원재료 값에 준하는 가격으로 고객에게 제공하여 고객의 만족을 얻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다. 기타 여행 기념사진 등 촬영을 위해 사진기를 두고 무료휴게소, 무료급탕소를 설치하여 유람객 본위와 지방발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교통은 경주에서 자동차로 1시간 40분, 다쓰노자동차, 교에이 자동차가 매일 수 차례 운행하고 있다. 대구 부근 사람들은 당일 유람도 가능하도록 여관 설비도 완전하고 정갈하기에 피서 위로에 더할 나위 없다.
(사진- 1933.5.19. <부산일보> 유원지의 일부)
굳이 '영리가 아닌 공공적 사업'이라고 강조하는 점은 송대의 울창한 송림과 기암괴석이 가득한 해수면을 일본인 개인업자가 점유하여 개발한 것이 일종의 특혜임을 보여준다. 인공수조를 활용한 신선한 해산물요리제공, 기념품, 당시로서는 귀한 사진촬영, 무료휴게소와 급탕시설, 숙박시설, 편리한 교통편을 강조하며, 식민지의 일본인은 근대적인 관광지를 개발하였다고 선전한다.
1933년 7월 21일 자 <부산일보>에는 해변에서 차양을 치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른바 근대적 '해수욕장'의 풍경이다.
<사진-감포해수욕장>(「부산일보」1933.7,21)
이러한 감포의 관광지화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송대말의 풍광은 당시 사진우편엽서로도 소개되었다고 하니, 유명세를 탄 듯하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유지되지 않았다. 개발 당사자인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쫓겨갔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이 군사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감포라는 식민이주어촌의 관광지화에 일본어신문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식민지시대 감포가 속한 경상북도 월성 군 양북면은 원래 농촌 지역인 어일이 중심 지역이고, 어촌인 감포읍은 일본인들이 해안을 따라 거의 새로이 만든 시가지여서, 한국어 미디어에 많은 기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산일보>와 같은 일본어 미디어에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이다. 「송대말 유원지」 개원에 대해서도 <동아일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송대말유원지의 개발과 선전, 홍보가 주로 조선 거주 일본인 대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사에서도 수학여행단과 가족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
경주 앞바다인 감포는 경주를 옛 신라의 도읍으로, 당시 일본과 신라는 서로 교통하며 뿌리가 같았다는 민족적, 혈연적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주장한 일본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공간이었다. 오천의 연오랑세오녀 설화, 나아리의 석탈해왕 설화, 감은사와 대왕암, 대본의 만파식적 설화는 모두 고대 신라와 일본의 친연 관계를 보여주는 장소로 일본인들에게 ’ 고향‘과 이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감포는 일선동조론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