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시마에서 온 도이구치

-감포의 일본인식민이주어촌 건설의 일등공신(?) -

by 뚜벅이

# 도쿠시마에서 온 도이구치-축항과 매립


1930년 제작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 감포의 명문가라 되어 있는 「도이구치 세이타로(渡井口清太郎)」는 누구일까? 감포를 일본인 이민 어촌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지도 제일 위에 따로 표기된 <도이구치옹비(渡井口翁碑)>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도이구치는 일본인의 감포를 만든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감포 신사 건립에 맞추어 1927년 12월 4일에 도이구치(渡井口)의 송덕비가 신사 경내에 세워졌다. 사진으로 보아 그 자리는 현재 감포에 남아있는 감포 산당 자리로 추측되고, 해방 이후 감포의 읍민들이 도이구치의 송덕비를 파괴하고 남은 흔적에 산당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산당 자리였을 가능성도 높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1930년 사진의 비석 기단부는 사진에 있듯이 현재 산신각이 있는 기단과 산당 공터에 남아있는 암석을 합치면 대단히 유사하다. 지배자의 흔적을 재활용한 사례??. 구룡포의 신사터에도 해방후 조선인들이 일본인 이름이 새겨진 참배로의 비석의 이름을 지우고 조선인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해방후 여러 지역에서 일본인 송덕비나 기념비의 비문을 지우는 사례가 일어난 것은 조선인의 자연스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도이구치 세이타로(渡井口淸太郞)는 도쿠시마현(德島縣) 출신이다. 희귀성이라 <일본 성씨록>을 찾아보니, 일본의 오사카와 도쿠시마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성이다. 2020년 현재 일본 전국에 60여 명 정도이다. 특히 도이구치라는 성은 도쿠시마의 나루토(鳴門)에 모여 있는데, 가가와현과 바로 경계에 있는 동네이다. 구룡포에 가가와현 출신들이 대거 진출할 무렵에 도이구치도 감포로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공로자명감>(1935)를 찾아보면, 그의 경력 및 활동에 대한 기술이 상세하다.


고향에서 어업에 종사하다 러일전쟁 후 조선을 시찰하고, 1915년 조선에 건너와 선어 운반업, 대부망(大敷網), 고등어유망(鯖流網), 수조망(水繰網) 등을 경영, 오히데구미(大秀組)를 창립하여 발동기선 15척으로 연안에서 선어 운반을 시작하고, 감포전기주식회사를 창설. 감포 방파제 축성. 남면보통학교 직원 봉급을 스스로 마련. 번영회장, 경북수산연합회 평의원 등을 역임함. 감포 신사 경내에 창덕비가 건립되어 있음. (조선총독부<조선공로자명감>1935:242)


도이구치는 구룡포 일본인 어촌을 대표하는 도가와(戶川), 와다(和田), 방어진의 나카베(中部), 부산의 가시이(香井)처럼, 일본에서 조선의 어촌으로 이주하여 일본인 거주지를 조성하고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조선에서 일본인식민어촌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의 공덕비를 세우고 기념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그의 공덕비도 세워졌을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시찰하고, 1915년 선어 운반업을 시작하여, 감포를 식민이주어촌으로 만드는데 진력하고, 고등어 어업으로 일확천금을 벌었다. 「부산일보」 1915년 5월 15일자 기사에 고등어가 2,775마리나 잡혀 호황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무렵 선어 운반업을 시작한 것이다. 영세 일본인 어민들이 어로 활동을 하고, 이를 자본력 있는 운반업자들이 큰 배로 모아 일본으로 운반하여 이익을 냈다.


이를 위해서는 석유로 움직이는 속도가 빠른 발동기선’이 필요한데, 아직 조선인들은 많이 소유하지 못했다. 1934년 경주군내 일본인은 20톤 미만 발동기선 85척을 소유하고, 조선인은 10척이었다.(젠쇼, 1934:461) 경주군내 전체 조선인 어민들이 소유한 발동기선이 오히데구미가 소유한 15척보다 작았으니, 일본인 어업자들이 감포 앞바다의 어업 자원을 싹쓸이했던 것이다.

1919년 당시 도이구치가 이끄는 오히데구미(大秀組)는 총자본 20만원으로, 총자본 300만원의 하야시가네구미보다 작지만 10위 안에 드는 일본인 운반업자였다. 도이구치는 1921년에 어업면허를 취득했다. (요시다 케이이치,1959:501)


‘경주군 일본수산주식회사(日本水産株式會社), 이토 쇼노스케(伊藤庄之助), 다쓰노 산노스케(龍野三之助), 주식회사 오히데구미(株式會社大秀組), 마쓰오카 마스타로(松岡益太郎), 스와키 라쿠조(洲脇樂造)에게 어업면허를 허가’(「조선총독부관보」 제2591호,1921.4.4)


‘일본수산주식회사’는 야마가미구미(山神組)가 1917년에 설립한 회사로 본점이 시모노세키에 있고, 1918년에 울산에서 마쓰자키(松崎壽三)를 대표로 지점을 설치하였다. 130만원을 자본금으로 하여 어업, 어획물처리운반, 매매, 어자금 대부, 어획물위탁판매업을 하였다. (「조선총독부관보」1918.5.18) 일본수산주식회사는 현재도 ‘닛스이(ニッスイ)’라는 브랜드로 영업하는 거대수산업체이다. 고래잡이 포경회사로도 유명했다.


이토 쇼노스케 미에현(三重縣 河藝郡 若松村) 출신이다. 경력 및 활동은 다음과 같다.


1907년 조선에 건너와, 어업 및 수산업에 종사하면서, 지예망(地曳網)을 처음으로 조선에 들여 옴. 조선 각지에 어장을 경영하면서 연안어업의 개발에 노력함. 조선수산수출회사, 부산수산회사 등의 각종 역(役), 상업회의소 평의원, 학교조합 부협의회, 수산화 등의 의원, 부산어업조합 조합장 등의 공직에 있음. 울산 부근의 서생면(西生面)에 어부 및 면민의 뜻으로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음. 명망이 높았음. 의협심이 강하여 서생면민에게 봄부터 가을 수확기에 이르는 일 년의 절반 동안 양식을 주었고 학생들의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함. (<조선공로자명감>:271)


이토는 울산의 유명한 어업자본가로 조선의 어업을 싹쓸이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1907년 설립된 ‘부산수산’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이토가 도입한 지예망(地曳網)은 ‘후릿그물’이라고 한다. 어선 1척(4~5명)에 육지에서 그물을 당기는 인원이 20여 명으로, 배로 바다로 나가서 그물로 고기 떼를 둘러싸도록 하고 그물의 양쪽 끝에 붙어 있는 긴 밧줄을 물가로 끌고 와서, 양쪽 밧줄을 10여 명의 사람이 잡고 그물을 반원형이 되게 하여 차츰차츰 해변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라 한다. 멸치, 전어와 같은 어종을 잡을 때 쓰는 방법이다.


도이구치는 오히데구미를 중심으로 감포의 어업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일본식 어업 방법을 구사했다. 대부망은 큰 그물의 일종으로 초기의 대형 정치망(定置網)이다.

수조망은 손으로 던지는 그물방식이다.

유망(流網)은 물고기의 통로인 수류(水流)를 가로질러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방식이라, 고등어나 정어리와 같은 회유어를 잡을 때 많이 썼다. 수로를 통과하는 모든 생물이 걸리기 때문에, 고래와 같은 생태계에 좋지 않아 현재는 금지되어 있다. 고등어 유망(鯖流網)과 관련해서는 감포에 60여 명의 고등어 유망업자들이 있어 조합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회장이 감포의 일본인 유력자 중의 한 명 마쓰오카였다. (「부산일보」1931.9.13)


일본인이 만든 도이구치의 인물평에는 ‘감포 건설의 대은인, 경북 어업계의 패자이자, 조선수산업계의 대공로자. 두뇌가 명민하고 과단성이 있고 진취적인 품성. 공공적 사업에 바치는 생각이 두터움’이라고 평가되어 있다. 일본인에게는 감포 건설의 일등 공신으로 추앙받았겠지만, 해방후 공덕비가 파괴된 것으로 봐서 조선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도이구치는 1920년 감포가 지정항으로 지정되고, 매립사업을 통해 감포의 구 일본인 시가지를 만들 때, 주축이 된 인물이다. 당시 도이구치가 조합장으로 있는 감포어업조합 외 30여 명이 중심이 되어 매립을 진행하였는데, ‘감포리 앞 해면 2,823평’을 매립하여 시가지를 조성했다.(「조선총독부관보」1924.9.6)


그 외에도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동아경제시보사, 1929-1941판)을 보면, 감포의 여러 산업에 사장이나 대표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각 지역의 일본인들이 걸어간 길과 판박이다. 어업에서 시작해서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어업, 선어 운반업, 매립사업, 감포전기(1926), 감포양조(1928), 감포온산업(甘浦鰮産業, 1937) 등에 그가 대표자로 되어 있다.

도이구치는 어업에서 시작해서 매립지와 관련된 토목, 전기, 주조, 비료사업과 같은 2차 산업 쪽으로 옮겨갔다. 자본금 8만 원의 감포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된 것은 경주 읍내와 같은 시기인데, 그만큼 감포에 생선의 가공, 제빙, 냉장에 전력 수요가 많았던 것을 반증한다.


# 멸치, 정어리, 청어, 고등어의 길

그중, ‘감포온산업’이라는 낯선 이름이 나온다. 온(鰮)은 정어리를 말한다. 정어리를 가공하는 공장이다. 정어리는 청어보다 작은데, 청어와 자주 혼동되어 함께 그물에 잡히곤 했다. 청어는 일본어로 니신(にしん, 鰊), 정어리는 이와시(いわし, 鰮), 멸치도 이와시(いわし, 鰯), 고등어는 사바(鯖)로 표기한다. 1900년대 전반 동해안은 청어, 정어리가 회유하여 엄청나게 잡혔다가 1930년대를 정점으로 해서 1940년대부터 급속하게 줄어 해방 이후에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 동해안의 청어는 조선에서도 유명했지만, 일본 쪽에서도 많이 잡혔다. 청어는 잔가시가 많고 상하기 쉬워 식재료로서는 고급이 아니지만, 동해에서는 '과메기'로 유명하다. 찬 바람이 불면 감포에서도 집집마다 빨랫줄에 과메기를 말리는 모습이 흔했다. 일본에서는 서쪽에 위치하는 내륙 지방 교토에서 동해에서 잡힌 청어나 고등어 요리가 유명하다. 가즈노코라는 청어알도 자주 식탁에 오르고, 니신소바(청어메밀국수), 사바즈시(고등어초밥)가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이유다.


<사진 -감포 어유제관 하물 송출상황:연간생산 2500통으로 통당 시가는 1원 50전(출처 젠쇼,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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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정어리기름을 드럼에 담아 하역하는 모습이다. 다시 시가로 1통당 1원 50전이라 되어 있다. 정어리는 쓰임새가 많은 자원이다. 식재, 비료, 기름으로 활용되었다. 정어리기름은 화학 물질, 화약, 연료로 활용되었다. 특히 화약에 필요한 글리세린을 추출하는 중요해서 전쟁에 중요한 물자였다. 정어리기름은 전시에 석유를 대체하는 연료로서도 대단히 중요했다. 당시 정어리기름은 일본 유지 업의 주요 원료가 되어 일본 전체 정어리기름 사용량의 약 3/4을 공급하였다.(요시다, 1956:520)


일본인들은 떼로 잡히는 정어리를 말려 비료로 만들어 농업생산량을 높였다. 근대 일본에는 면화 재배를 위해 정어리 비료가 많이 사용되었기에, 금비’로 불리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바다의 정어리로 키운 면화는 다시 ‘메리야스(メリヤス)’로 직조되어, 조선으로 수입되어 높은 값으로 팔렸다. 「부산일보」에 정어리비료의 전매가 가능한가라는 기사도 실릴 정도였다. 정어리 어업은 1930년대 최고조에 이르렀다.


도이구치가 환갑을 자축하여, 감포노동야학교에 일십원을 기증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중외일보」1928.4.25.) 현재는 ‘야학’하면 식민지 시대 민족저항운동을 떠올리지만, 한편으로 ‘야학’은 일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식민교육기관의 측면도 있었다. 감포노동야학교의 실체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타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감포의 일본어 문해 능력을 보면, ‘일본어강습소’의 기능을 했을 것이다. 1930년 조선인 포함 양북면 인구가 21,974명인데, 인구의 5%인 1,000명 남짓만 일본어나 조선어를 알고, 나머지 85%는 문맹인 상태였다.

1932년 7월 9일 감포에 처음으로 상설야구장을 건설한 것도 도이구치였다.(1932년 7월 12일 「부산일보」) 감포에서 야구대회가 빈번하게 열렸다.


감포 앞바다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쫓아 도쿠시마에서 조선으로 와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1940, 1941년에는 감포 읍장을 역임했다. 「부산일보」(1940.04.25.)에 도이구치가 감포 읍장으로 임명되어 화합에 중점을 둘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읍 승격후(1937) 타지에서 후쿠다, 마쓰이라는 두 읍장이 왔으나, 관민 사이에 분규가 끊이지 않아, 낙하산인사를 배격하고, 지역에서 온화한 아버지와 같은 자로 추앙받는 도이구치를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이주 일본인 사회의 1세대인 원로를 읍장에 기용한 것은 읍 승격후 이해관계를 둘러싼 일본인들의 분란이 있었다는 말이겠다.


‘경제적 이익에 대한 추구야말로 재조일본인 사회의 정치적 논의 및 정치운동의 원동력’(이승엽,2013:240)이라는 지적대로, 도이구치는 식민지에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의 추구와 지속을 위해, 학교조합, 어업조합, 사장, 읍장까지 두루 거쳤다.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 쇼와초와 혼초 1정목의 교차로, 현재 육거리 자리에 그의 집과 오히데구미 사무실이 있었다. 현재 육거리에서 해국길로 들어가는 첫 번째 일본식 가옥이 도이구치의 저택 자리라 추정된다. 감포수산물상회 뒷편 2층 건물이다.

<사진-대일본직업별명세도 중 발췌, 번역>


<사진-해국길 입구 도이구치 자택 터 추정지>(필자 사진)

화면 캡처 2025-05-24 073045.jpg


자료에 생몰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는 해방후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그 뒤에는 감포와 인연이 있었을까? 구룡포처럼 그의 2세들은 다시 감포를 찾았을까? 감포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였을까? 이미 1945년에 80세 가까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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