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의 일본인학교

by 뚜벅이
사진-「조선 오만분일 지형도-경주」>(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1914 측량, 1918 발행)



감포소학교

1914년 10월에 일본인을 위한 감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개교했다. 1918년 지도에 학교가 표시되어 있다. 「대일본직업명세도」에는 도이구치 송덕비 바로 옆에 감포학교조합 사무실이 표시되어 있다. 구룡포는 1915년 6월에 일본인 학교를 개교했으니, 감포가 조금 빨랐다.

학교조합은 현재는 낯선 용어이지만, 일제 시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통합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 중 하나였다. ‘학교조합’이란 법인으로, 그 구역 내에 주소를 가진 일본인들이 조합원이 되고, 관의 감독을 받아 법령 범위 내에서 일본인의 교육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젠쇼,1934:23-24) 즉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이 일본인 교육재정 확보를 위해 만든 조직이다. 당시 경주 군내에는 경주, 감포, 안강, 모량, 아화 5개의 조합이 있었다. 전부 일본인 집단이주 지역이다.

내지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소학교는 경주공립심상소학교를 비롯해서 감포, 안강, 모량, 아화의 5개교가 있고, 그 중 경주소학교가 가장 오래 되고, 감포, 안강의 양교는 1914년 10월 동시에 개교하고, 모량은 1922년 6월, 아화는 1924년 8월에 개교하였다. 이들 5개교의 학급수는 합계 14, 교사 수는 17인, 생도 수는 남 262, 여 238, 계 500인, 교지 평수 6255평, 교사 건평이 549평이다. (젠쇼,1934:310)


식민지 시대 교육은 일본인 교육과 조선인 교육으로 나뉘었다가, 1938년 「조선교육령」으로 제도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 ‘소학교’로 통합했다. (조미은,2018:245) 그러나 여전히 차별은 존재했다. 1943년에 발표된 4차 교육령은 전시체제화를 목적으로 교과목에서 조선어가 폐지되었다. 1917년경부터 감포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정착하였는데, 일본인 학교는 그 이전부터 있었으니,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이미 상당히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 감포 전체 일본인이 742명인데, 1932년 자료에는 감포소학교는 4학급 136명의 일본인 아동이 있다. 또한 아래 표를 보면 경주읍을 제외하면, 경주 군내에서 일본인 학생 수가 가장 많고, 교사평수도 넓어, 감포읍의 일본인 인구 밀도가 대단히 높고,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진-감포소학교>(출처:「대일본직업별명세도」1930)

사진에는 상당한 규모의 번듯한 새로운 학교 건물이 보이고, 학생들이 단체복을 입고 무슨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표-경주군내소학교일람표(1932년 4월말 현재)>(출처:젠쇼,1934 의 표를 간략화)


1933년 5월 10일 자 「부산일보」에는 ‘감포소학교 부형회 개최’ 소식이 실려 있다. 회장 아키바(秋葉), 부회장 고미네(小峯), 간사 고타(幸田), 평의원 즈시(団子), 다키구치(滝口), 야마모토(山本), 도이구치, 오카다(岡田), 니시이(西井), 기시모토(岸本)가 등장한다.

이들의 이름을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 확인해보면, 아키바, 고타, 즈시, 기시모토, 야마모토가 상점을 갖고 있고, 송덕비가 있는 도이구치의 이름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감포의 일본인 유지들이 학교조합과 학부모회의 주축이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조선인교육은 어땠을까?


일면일교주의(一面一校主義)는 조선에서 보통교육의 일 목표로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대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경주군에서는 1911년 4월 경주읍에 경주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된 후, 타면에서도 차례로 설립을 보기에 이르러, 1929년에는 북천, 내동 및 견곡의 삼면에 설립되어, 이로써 완전하게 12면 모두 보통학교를 갖게 되어, 일면일교 실현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1926년 4월에는 경주여자보통학교가 경주공립보통학교와 분리되어 설치되기에 이르러, 현재에는 보통학교는 13교에 달하고, 옥산, 남명, 계남, 영창의 4개 사립학교도 각자 상당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젠쇼,1934: 311-312)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의 면에 하나의 학교를 두는 원칙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이 없어 보이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수를 비교하면, 조선인에게 대단히 불리하다.


<표-경주군내 보통학교 일람표(1932년 4월 현재), 젠쇼<생활상태조사-경주군>의 표를 간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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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촌공립보통학교

당시 감포가 속한 양북면의 조선인들은 전촌에 있는 전촌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설립인가도 1921년 10월 20일로 일본인소학교보다 늦게 나고, 1922년 4월 1일에 조선인 교육을 위한 학교로 개교했다. 1925년 4월 9일, 6년제로 개편되고, 1938년 4월 1일, 전촌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다. 이 시기에 1938년 <조선교육령>으로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가 통합되었다. 그러니, 양북, 감포 지역에서 조선인 교육으로 가장 오래된 근대적 공적 교육기관은 전촌초등학교였다. 현재는 2009년 감포초등학교로 통합되어, 87년의 긴 역사의 문을 내렸다. 일본인 학교보다 8년 늦게, 게다가 감포소학교는 일본인거주지에 근접하여 세워졌지만, 전촌보통학교는 현재의 감포읍, 양북면에 걸친 넓은 지역에 단 1개교뿐이었다. 당시 조선인 학생들의 통학이 얼마나 곤란했을지는 상상이 된다. 1980년대에도 호동이나 오류에서 감포초등학교로 통학하는 길은 1시간이상 걸렸다. 조선인 아동수 285명에 6학급, 교원수 6명인데, 일본인 아동이 다니는 감포소학교는 아동수 136명에 학급수 4학급, 교원 4명이었다. 단순 비교해도 아동수가 2배로 많은데, 학급수는 1,5배 밖에 되지 않는다.


사립 양명학교, 남명학교

사립학교는 양남에 양명학교, 양북면에 남명학교가 있었다. (�경주시사 제2편�, 358)


<사진- 「경주남명학교 승격운동」「동아일보」1935.7.26.)

남명학교는 구한말 만파정의 서재에서 시작하여 한일합방 당시 장기군수의 주창으로 남명학교로 변경하여 신교육을 하다가 1924년 양북면 어일리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최부식,2018:530) 조선인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1935년 200여 명이 통학하는 사립학교를 공립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자 조선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했다. 양북면에서 조선인을 위한 교육기관은 해안가에 치우친 전촌공립보통학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차이로 전촌공립보통학교는 시설이 감포소학교보다 낙후되어, 해방후에도 비교가 되었다 한다.

1942년 ‘감포동부공립학교’가 1942년 3월 31일 설립인가를 받고 4월 1일 개교 했다. 신축교사가 완공될 때까지 당시 감포금융조합 사무소를 가교사로 해서 1학급을 편성해 수업을 시작했고, 9월 1일 감포읍 오류리 479번지 소재 학교 부지에 교무실과 3개 교실이 완공돼 제 모습을 갖춘 교실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 부지는 이후 감포중고등학교가 되었고, 현재는 한국국제통상마이스터고등학교 자리이다.

해방후 감포읍 감포리 17번지에 소재한 감포공립국민학교가 감포국민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현재는 감포초등학교가 되었다. 일본인 학교 시절부터 시작하면 현재 감포초등학교는 100년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1918년 발행 지도에서는 학교 위치가 현재 위치와 다르나, 1930년대 지도에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있다.

1931년 ‘감포공립심상소학교’는 4학급에 총학생 136명, 교원 4명, 부지 1200여 평, ‘전촌공립보통학교’는 6학급에 총 학생 243명 교원 6명이다. 학생수가 2배인데도, 학급수도 교원수도 적다.


비싼 교육비에 체납, 중도퇴학 속출

교육비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인에게는 부담되지 않는 교육비도 조선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지배자인 일본인들도 알고 있었다. 제국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정 규모의 공교육이 필수적이나, 극심한 식민지 수탈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것을 일본은 ‘민도가 낮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내지인 경영의 소학교에서는 아동교육비 부담이 별 곤란없이 원활하고 이루어지고 있으나, 조선인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보통학교의 경영에 대해서는 민도가 낮은 관계로 상당한 곤란을 보이고, 따라서 수업료의 체납이 적지 않고, 또한 취학 중도에 퇴학하는 자가 많은 것은 유감이다. 즉 1931년도 수업료 체납자는 1기 224인, 2학기 265인, 3기 144인, 4기 178인, 합계 807인으로 많고, 그 사이에 560인의 중도퇴학자를 낳았다. (젠쇼 에이스케,1934:314)


젠쇼 에이스케 자료에서 1931년 전촌보통학교 학생수가 총 285명인데, 수업료 체납자가 1기 224인, 2기 265인 3기 144인, 4기 178인 인 것은 매 회기마다 절반 이상의 학생이 수업료 지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립보통학교 중도퇴학조사(1931년도)에도 전촌학교는 35명이 중도퇴학을 하여, 전체 학생수의 약 1/8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를 보여준다.

젠쇼 에이스케는 같은 책에서 학교 교육의 보급에 동반한 교육비 부담에 관해서, 각 읍면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지를 돌리고 회답을 받아 정리했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자녀교육부담과 이에 따른 경제상의 곤란 정도

이것이 부담이 되는 특별히 사항이 있다면 그 대략적 상황


양북면의 회답이다.


보통 생활자의 교육비인 군학교비, 보통학교, 사립학교의 수업료는 과중하다고 할 수 없지만, 하급 생활자에게는 수업료 부담때문에, 교육할 수 없는 자가 있다. 또한 본면은 보통학교의 통학 거리 관계로 사립양명학교 설립이래, 동교 유지비로서 학무계(學務契)를 조직하고, 동 계비를 면 전체에 걸쳐, 1호당 평균 40전을 할당하여 부담시키고 있는데, 이 또한 하급생활자에게는 경제상 부담 곤란한 상태로, 약 2할 정도는 예년 미납자가 있다. (젠쇼 에이스케,1934:317)


양북면의 조선인 학생의 중도퇴학, 수업료 연체자가 전체 학생수에 비해 대단히 높다. 퇴학자는 285명 중 35명으로 약 8.14%, 체납자는 285명 중 171명으로 절반의 학생이 4분기 중 한 번은 체납자라는 비율이다. 또한 일면일교주의로 조선인 학생수에 비해 학교가 터무니없이 모자라고, 전촌에 학교가 위치해서 통학이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인의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전 면의 조선인들이 집집마다 계비를 내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어 능통자는 감포에

당시 일본어의 보급 정도를 살펴보면, 당시의 감포의 교육 상황을 더 잘 알 수 있다.

<표-일본어보급조사(1931년)>(젠쇼,1934:3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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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는 대단히 흥미롭다. 경주군 내에서 일본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감포가 포함된 ‘양북면’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다. 1931년, 양북면에 일본인이 918명, 조선인이 21,056명이 거주했다. 그중 1,338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본어를 알고 있다. 일본인을 전부 포함해도 양북면에서 일본어를 구사하는 조선인이 400명 넘게 존재했다는 것이다. 타지역에 비해 일본어를 아는 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이 말은 감포가 일본인 중심의 공간이었고, 거기서 생계와 직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도 일본어 능력이 필수였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읽고 쓰는 정도’에 대한 조사도 있다.

1930년 10월 시행한 국세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주 도내에 있어서 각 읍면별 인구의 읽고 쓰기 정도는 다음 표와 같다. 총인구 18만 1백명 중 가나 및 언문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4%, 가나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1.2%, 언문만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9.5%, 가나 및 언문을 읽고 쓸 수 없는 자는 85.3%에 달하여, 또한 문맹자의 비율이 극도로 많은 것을 보여준다. (젠쇼,1934:335)


<표-읽고 쓰는 정도 읍면별 인구 (1930.10)>(출처:젠쇼,1934의 표를간략화>



이 표에서 ‘가나만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거의 대부분 재조일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거주하는 인구 비율과 비슷하다. ‘가나 및 언문을 쓸 수 있는 자’는 거의 조선인이다. 생존을 위해 조선인들은 두 언어를 구사해야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은 아주 예외적이었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언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피지배자에게 높은 지적 능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인 인구의 80% 이상이 문맹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서면(현재 안강 일대)과 양북면은 일본인들의 집단 이주지역이어서 일본인이 많고, 일본어 사용 빈도도 높았다. 이에 비해 경주 읍내는 과거부터 양반 사대부가 많고, 조선인의 교육 정도도 상대적으로 높아서, 인구 대비 ‘일본어와 조선어를 이해하는 자’의 비율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창씨개명

1940년 2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시행하여,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압적으로 바꾸도록 했다. 초기 참여율이 6%에 불과하여, 총독부는 여러 방법으로 창씨율을 끌어올렸다. 조선인 지역유지, 면장 등이 앞장서서 독려했다. 1940년 2월 20일 자 「부산일보」에는 ‘감포에도 창씨개명 신고자가 속출’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양남면장, 감포 박남진은 모모이(挑井)로, 김창조는 오쿠라(大倉)로 개명하여, 이미 인감신고도 변경했다는 기사를 실어, 창씨율을 높이고자 하였다.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하는 등 불이익을 주었다.

창씨개명은 이광수같은 친일파뿐 아니라, 민족저항시인 윤동주도 일본유학을 위해 피할 수 없었다. 일반 조선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고향 벼루 상자에 새겨진 연도 쇼와18년, 즉 1943년은 학도지원병 제도가 실시되고, 전쟁으로 치닫는 시기였다. 일본어를 배우며 자신의 낯선 성을 벼루에 새겨 보았을 조선인 오(吳)가 아닌 문원(文原)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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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의 회상기에 공통된 것은, 일본인 거주 지역의 일본인 학생들은 조선인과 거의 교류없이,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끼리 지냈다는 사실이다. 조선에서 살아도 조선어를 모르고, 접촉이라 해봐야 사환이나 집에서 일을 돕는 조선인 여성들 정도였다. ‘여보(ヨボ)’, ‘오모니(オモニ)’라는 말을 조선인을 지칭하는 언어로 사용하면서, 일본인 거주 공간을 벗어나면, 전혀 다른 별세계이고 두려운 공간으로 인식했다. 식민지배란 민족간 불평등 구조가 본질이기에, 감포도 다르지 않았다. 최씨성은 일본식으로 ‘사이상’이라고 불리었다.


식민2세의 등장

식민지배가 길어지면서 식민지에서 나고 자란 재조일본인 2세들도 점점 등장한다.

<사진-포항과 감포의 2세 동지 손을 잡다> (출처:「부산일보」1939.6.7.)

기사에는 포항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 2세 자녀들과 감포의 일본인 2세 자녀들이 함께 모임을 하며 친목을 도모했다고 전한다. 감포 ‘논토회(ノントウ会)’와 포항 ‘삼일회(三日会)’가 중심인데, 감포 유력자 도이구치의 자녀, 포항 유력자 오카미(大上)의 자녀가 있었다. 1세대들의 정착 기반 위에 2세들이 지역의 중심이 되고, 인근 지역의 일본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는 조선의 학교 동창회나 향우회를 조직하여 일본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동창회지나 향우회지를 발행하였다. 대구 일본인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구우회(邱友會)’나 울산의 ‘방어진회’가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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