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야성 감포

ー 여관과 요정 ー

by 뚜벅이

식민지 시대 감포에는 많은 유흥시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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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일본직업별 명세도>중 중앙주 지도
사진- 현재 감포 안길 주변 지도

식민지 항구 도시의 전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지도로 살펴보면 현재 감포 안길에 해당하는 감포교회 계단을 내려서 항구로 향하는 골목길을 따라 여관, 요정들이 즐비했다. 그 아래 위로는 어업 관련 점포들이 들어서 있었다. 조선의 일본인 이주어촌은 고등어 성어기에 이곳을 이용하는 일본인 어민들의 대형어업의 근거지가 되었다 한다. 현지에는 고등어어업에 필요한 얼음제빙소, 고등어 염장고, 철공소, 어구 부속품 등을 파는 상점과 어민들이 쉴 수 있는 목욕탕, 이발관, 당구장, 술집, 음식점, 요정과 같은 유흥시설이 많이 생겨났다. 감포도 고등어 어업으로 활황이었기에, 어업에 종사하는 일본인, 조선인을 상대로 지역 규모에 비해 많은 요정, 여관이 있었다.


사진- <감포요리조합총회>(「부산일보」1940.4.17)




【감포] 감포요리조합총회는 4월 13일 오후 6시부터 요정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리에 경부보 및 담당관리의 참석을 요청하여 업무상에 있어 주의사항 및 업자의 희망 등을 진정하며 터놓고 간담회를 하여 매우 유효하게 종료되었다. (「부산일보」1940.4.17.)






유흥업소들의 단체인 감포요리조합도 만들어졌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사건 사고도 많았으니, 경찰과 담당 관계자도 참가하여 당부사항과 업자들의 요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1930년 지도에는 계림관, 다바타, 호라이테이, 이치후쿠, 후나야, 다이산요 등의 6개의 요리점, 감포마쓰시마여관산요여관 2개 업소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 나오지 않은 소규모요리점도 있었을 터이니 상당한 수이다. 그리고 고토부키목욕탕(이후 감포신천탕 자리, 현재는 감포 1925라는 카페 자리)도 있었다.


사진 카페 1925 감포(구 신천탕, 고토부키목욕탕 자리)



일본인의 조선수산업이 실패한 원인으로 유흥가가 발달하는 식민지이주어촌의 특징이 지적되기도 한다. 어부들이 어로에서 돌아오면, 유흥가가 먼저 기다리고 있어, 바로 유흥에 수입을 탕진한다는 것이다.


통어 초기에는 어민 교양의 결함이나 통어의 성격에서 주색과 도박이 이들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녔으며, 여러 어민 중에는 이런 유혹에 빠진 자가 많아 조선 통어에서 암적인 존재였다. 특히, 조기, 고등어어업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져, 술과 여자가 먼저 어촌으로 들어와 각 어업근거지에 머물며 어부들을 맞이한다는 조선 특유의 파시 풍경을 연출하였다. (요시다 게이이치:1959,600)


경주에서 성장했던 재조일본인 2세 모리사키 가즈에<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1976, 채경희 역 <쇠사슬의 바다> 박이정, 2002)에서 해외로 나갔던 일본 성매매 여성들의 역사를 기록했다. ‘가라유키상’은 근대 일본이 해외로 팽창하면서, 해외 유곽으로 돈벌이에 나선 여성들을 규슈 지방에서 가리키는 말이다. ‘가라’는 ‘당나라(唐)’이고, ‘유키’는 ‘가다(行)’라는 뜻으로 '당나라'는 일본 밖 해외를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어 해외로 돈벌이 간 사람들, 특히 그중에도 여성을 가리킨다. 근대화에 뒤처져 특별한 산업이 없던 나가사키나 구마모토의 벽촌에서 가족의 입을 덜고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해외에 팔려나간 여성들이 식민지의 유곽을 채웠다. 일본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이라면 구만주, 중국, 조선, 동남아시아까지 어느 곳에서나 '가라유키상'을 볼 수 있었다.

감포에 남은 식민지 시대 여관, 요리점의 흔적은 그러한 시대의 흔적이기도 하다. 전쟁과 함께 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의 모습과도 오버랩되는,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와 함께 한 여성들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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