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신도 따라오고

-감포 신사-

by 뚜벅이

# 감포신사


현재 감포 안길 쪽에 '감포신사'가 있었다. <대일본직업별명세도>의 서쪽 높은 지대에 몰려 있다. 서구 제국주의가 기독교의 ‘미션(mission)’을 앞세워, 신대륙을 침략한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도 그들의 종교를 앞세워 조선의 개항장으로 몰려들었다. 한반도에 그들이 믿는 신과 부처도 그대로 데려왔다. 1930년대 경주 군내에 일본 불교 종파인 진언종 본원사파, 조동종, 진언종, 진언종 성호파, 일연종 및 조선사찰, 기독교로는 조선야소교 장로회, 동양선교회, 구세군, 천주교 등이 있었다. (젠쇼,1934:341-342)


아래 지도는 당시 지도에 한글로 필자가 고쳐본 것이다. 지도에는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장소는 크게 그려져 있는데, 감포신사의 면적을 보면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현재 감포교회 터헤 해당한다.

사진-<대일본직업별명세도>중 좌측 상단부(번역 필자)


지도에는 기독교 관련 시설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의 감포제일교회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해 있는데, 이 자리에 감포신사가 있었다.

이 지도와 대조하면서 최급에 다시 찍은 사진이다.


화면 캡처 2025-05-12 093832.jpg 사진- 왼쪽부터 산당 담, 산당, 수반


1) 감포 신사

왼쪽에서 첫 번째 사진은 감포제일교회 옆 신사 터에 남아 있는 흔적들이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산당’과 '수반'(신사에 참배하기 전 손씻는 물을 담아놓는 도구)이다. 첫 번째 사진은 소나무 옆 벽으로 산당을 두른 담과 담 옆에 있는 수반이다. 산당 담 밖에 남아 있는 수반은 원래 자리에서 옮겨져 있다.


두 번째 사진은 담 안에 남아 있는 산당이다. 감포읍에서 ‘산당’이라 팻말을 세웠으나, 무슨 근거로 그렇게 했는지는 설명이 없다. ‘산당’은 산신을 모신 집이라는 뜻일 것이다. 일본인이 신사를 세우기 전에는 언덕 위의 ‘산신각’ 자리였을 지도 모르겠다. 마치 이슬람의 교회 자리에 다시 기독교 교회가 서고 하는 것처럼, 해방 후에도 종교 시설로 사용되었다. 그 자리가 신사터가 되고, 다시 교회터가 되었으니, 속되게 ‘신기’가 강한 장소인가?


이 자리는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 보면 감포를 일본인이주어촌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도이구치의 송덕비가 있던 자리이다.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 실린 도이구치 송덕비 사진과 비교하면 남아있는 기단의 모습이 거의 흡사하다. (도이구치에 대해서는 다음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사진-<대일본직업별명세도> 중 도이구치옹송덕비

해방이 되고 조선인들은 감포에 침입한 일본인 송덕비를 없애고 기단만 남겨놓은 듯하다. 그 역사적 유래를 알 수 없게 된 자리에 어느새 산당이 생긴 것일까? 전면부는 타일, 돌기단 위도 타일로 되어 있다. 신각은 타일을 붙인 것으로 보아, 해방 이후에 만들어진 듯하나 확실하지 않다. 상세는 알 수 없으나, 지붕과 돌기단은 일본의 흔적이 역력하다. 구룡포에 가면, 구룡포 일본인 이주어촌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도가와 야스브로의 송덕비가 있다. 해방 이후 남은 일본인 유적에는 일본인의 흔적을 지우고, 다시 조선인의 흔적을 새겨 놓은 게 많다. 지배에 대한 분노와 설움, 그리고 협력의 흔적을 지우고 싶은 심정의 발현일 것이다.







세 번째 사진은 수반의 전면부로, ‘봉헌’이라 새겨져 있고, 측면에 연도, 뒷면에 신사 건립에 힘을 쓴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반의 연도는 신사 건립년도인 1927년(昭和2년) 12월이다. 감포항을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참배로인 계단을 올라가서 감포 신사가 있었고, 해방 후에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다. 이 참배로는 현재도 해국이 그려진 계단으로 남아, <조립식가족>이라는 드라마의 촬영지로 매회 등장하기도 했다.



<사진-감포 신사>(출전: <생활상태조사-경주군>)

네 번째 사진은 식민지시기 감포신사이다. 재조일본인들은 어느 지역에서나 가장 전망이 좋고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곳에 계단으로 된 참배로를 만들고 신사를 세웠다. 서울 남산, 수원 팔달산, 목포 유달산, 대구 달성공원, 김천, 부산 용두산, 구룡포에도, 감포에도. 사진에서 신사에서 조선 아이들이 철없이 놀고 있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하다.


감포 신사는 1927년에 설립 허가가 났는데, 구룡포 신사는 이미 1923년에 허가가 났으니, 그 이전부터 신관이 없는 채 비공식적으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1927년 4월 23일 자 「부산일보」에는 ‘감포 신사가 경내 확장을 위해 각 호의 부역으로 땅고르

기 공사에 착수’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수반 뒷면에는 2단으로 신사 확장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이름들은 1930년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 등장하는 상공업자들의 이름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일본인 이주민들은 가구당 부역으로 신사 확장 작업에 참가한 것으로 보아, 신사가 이주민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사진-감포신사 터 수반의 측면, 전면, 후면>


수반 뒷면에는 이런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이시다, 이노우에, 이나가키, 하마, 오구치, 오니시, 가와무라, 다가와, 다시타, 나카마스, 나카타니, 나카무라, 우메타니, 구니하라, 마쓰모토, 가쓰다, 곤도, 데라사키, 기다, 시라이시

간사(世話人) 기시이, 나쓰다


. 부산의 동래 신사, 울산 장생포 신사, 구룡포 신사도 감포 신사도 조선총독부에서 공인한 「진메이 신사(神明神社)」였다. 진메이 신사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천황가 조상신 「아마테라스오카미(天照大神)」와 건국에 관련된 신들을 받드는 신사이다.


1930년 9월 20자 신문에는 신사의 가을 마쓰리를 9월 15, 6일 양일간 부산 용두산 신사에서 온 신관이 성대하게 주관했다고 되어 있다. 용두산 신사는 식민지 조선에 가장 먼저 설립된 일본 신사이다. 감포학교조합 사람들을 중심으로 감포소학교에 모여 방생, 불꽃놀이, 꽃꽂이 대회를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일본 본토와 다를 바 없는 일상생활을 영위한 것이다.


식민이 길어지면서 신사는 점점 하는 일이 많아진다. 1934년 3월 4일 자 「부산일보」에 이제까지 감포 신사에는 전속 신관이 없었는데, 전 부산 용두산 신사 신관이었던 히라타(平田)가 신관으로 왔다고 전한다. 중일전쟁에 돌입한 1938년 10월 25일 자 기사에는 ‘전병사자를 위한 위령제’도 열었다.


일본의 신도는 불교와 함께 일본인의 의식 가장 깊숙이 자리한 중요한 종교이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천황제 근대 국가를 떠받치는 중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일본 각지에서 식민지로 몰려든 일본인을, 나아가 조선인, 대만인조차, 국민으로 통합시키고자 했다.


그 흔적들은 한국 전역에 산재해 있다. 당연히 신사는 해방 이후 조선인들이 일제의 흔적으로 가장 먼저 파괴한 일본의 상징이었다. 도리이, 고마이누, 본전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돌계단, 수반, 석등, 고마이누(일본의 신사나 사원의 입구 양옆 또는 본당 정면 양 옆에 한 쌍으로 놓아두는 짐승상 )등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감포의 경우에도 참배로에 해당하는 현재 감포 교회앞 돌계단과 돌로 만든 수반이 남아있는 것이다.


감포항을 전망할 수 있는 해국이 그려진 돌계단에서 멋진 관광사진도 좋지만, 과거의 흔적이 무엇인지 역사적 설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좋아하기에는 저 황금어장에서 일본으로 수탈된 어업자원이, 신사에서 산신각으로 다시 교회로 가는 그 길의 변전이 씁쓸하다. ........

사진-감포 교회 앞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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