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로 밀려드는 일본인들

by 뚜벅이

당시 감포로 밀려든 일본인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자료로 확인되는 것은 감포에 일본인 마을은 1905년에 처음 설치되었고, 1914년에 총 5호로 남 5인, 여 7인 총 12인이다. 감포와 유사한 구룡포 일본인 이주어촌은 1907년에 형성되고 호수 12호, 40인이 있었다. 방어진은 1905년에 형성되고 호수 208호, 755인이 있었다. (조선수산조합 <수산통계요람>1914, 김수희:에서 재인용) 아직 미미한 인구였다.

그러나 1917년 후쿠이 어업단이 집단이민을 오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해서, 1920년대에는 상황이 일변했다. 대량으로 어획되는 물고기 덕분에 밀려드는 일본인과 조선인들로 1930년대 감포는 골드러시를 맞았다. 감포의 인구와 직업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젠쇼의 <생활상태조사-경주군>에서 읍면별 호구를 참조하면, 경주읍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와 감포를 포함한 양북면의 일본인 수가 거의 차이가 없다. 인접한 양남은 거의 일본인이 없는 것에 비하면 대단히 많은 숫자이다. 1933년 구룡포의 일본인 인구가 230호 800명이었는데, 큰 차이가 없었다. (박정석, 2017: 79)


화면 캡처 2025-05-03 194443.jpg <표-1931 현재 읍면별 내선 외인 호구>(젠쇼, 1934:217의 표를 간략화)


감포 안에서도 항구를 중심으로 한 감포리가 인구가 제일 많았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이 공간에 거주했다. 1914년에서 1929년까지 15년간 인구 증가가 많은 부락(면별, 지수 140 이상)을 보면, 경주군내 각 면의 인구증가지수가 평균적으로 지수가 150 전후인데, 양북면 감포리만 435.8로 비상하게 높다.(젠쇼, 1934:196) 그만큼 어업의 성황으로 감포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는 의미이다.


화면 캡처 2025-05-03 194615.jpg <표-지세 및 호구>(출처:젠쇼, 1934:223의 표를 간략화)

표에서 보면 감포리의 인구는 15년 사이에 118호에서 719호로 6배 가까이 늘었지만, 오류리는 174호에서 259호, 전촌은 133호에서 192호로 늘기는 했지만, 감포리만큼 폭증하지는 않았다. 감포항 주위로 일본인들의 증가 추세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1929년 감포리의 719호를 다시 세분화하면, 일본인 196호 742명, 조선인 518호 2,130명, 중국인 5호 13인이다. 경주군내 어촌은 양남, 양북뿐인데, 양남 하서의 일본인이 7호 30명, 조선인 192호, 1121명, 중국인 9호 29명인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젠쇼, 1933:767)


1931년 경주군의 호구수는 31,759호, 17,803인으로, 그중 일본인 644호 2,786인, 조선인 31,102호 167,967인, 외국인 13호 50인으로 되어 있고, 이들 인구 인구비율을 나타내면 일본인 1.6%, 조선인 98.4%이다. 그리고 경주군 12개 읍면 중 인구수가 가장 가장 많은 곳은 양북면으로 22,030인, 서면 193,015인이 그다음이고, 경주읍 18,412인, 강서면 17,197인, 내남면 15,382 순이다. 인구 밀도로 보면, 역시 경주 읍내를 포함하는 경주읍이 가장 높아, 1평방당 7,687인, 강동면 2,581인으로 뒤를 잇고, 서면 2,085인, 그다음이 양북면 2,060인 순이다. (젠쇼, 1934:40)


감포로 몰려든 일본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젠쇼 에이스케는 총독부가 간이국세조사를 시행한 것에 기반하여, 조선의 인구를 연구하여 <조선의 인구연구>라는 저작을 발표하고, 1923년 통계조사에 기반하여 「내지인 본적별 호구표」를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의 일본인은 본적별로 보면, 야마구치(山口) 현 37,370인으로 1위, 뒤이어 후쿠오카현 29,376인, 나가사키현이 24,351인으로 가장 많다. 뒤를 이어, 히로시마, 구마모토, 오이타, 사가, 오카야마, 가고시마, 에히메, 도쿄, 아이치, 시마네순이다. 이들 부현에서 1만 명 이상 인구가 조선에 왔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규슈, 추고쿠, 시코쿠의 일본인이 많다. 그리고 가가와 9,810인, 도쿠시마 6,388, 미에 6,169인, 후쿠이 5,902인이다. 또한 상인, 화류계에서는 오사카가 가장 세력을 점하고 대체로 풍속 습관 등에 간사이 분위기가 농후하다고 하였다. (젠쇼, 1925: 53-56)


1931년 경주군내의 일본인수는 2,786인인데, 이를 본적 별로 보면, 가가와현 477인으로 가장 많고, 후쿠이현 281인으로 그다음이고, 야마구치현 187인, 나가사키현 136인, 오카야마현 123인, 고치현 109인, 가고시마현 102인 순으로 되어 있고, 시코쿠, 주코쿠, 규슈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젠쇼, 1934:42) ‘경주군’ 전체의 일본인 수이나, 경주군내 일본인이 제일 많은 지역이 감포를 포함한 양북면이므로, 감포의 일본인 출신지도 가가와현이 제일 많다고 볼 수 있다. 야마구치 출신이 조선 전체로는 제일 많이 넘어왔는데, 감포의 경우에는 독특하게도 시코쿠의 가가와 출신이 제일 많고, 다음이 후쿠이 순이다. 가가와현과 후쿠이현에서 어업종사자가 집단으로 이주하여 촌락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 조사도 흥미롭다. 경주군의 조선인은 절대다수가 농림목축업이다. 일본인은 공무 및 자유업, 상업이 제일 많다. 상대적으로 농업, 어업에 종사하는 자가 적다. 1931년 양북면은 농업에 종사하는 일본인이 한 명도 없었다. (젠쇼, 1934:395) 또한 어업도 일본인들은 고작 299명이지만, 조선인은 무려 1,922명에 달한다.


화면 캡처 2025-05-03 194802.jpg <표-직업별 인구(1931)>(젠쇼, 1934:43-44 표를 간략화)

아울러 젠쇼는 1930년 경북 포항, 구룡포, 감포의 경찰부장에게 의뢰하여 각 지역에 온 일본인의 직업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가 아래 표이다. 아래 표를 보면 일본은 많은 어선에 적은 어부, 조선은 적은 어선에 많은 어부가 일하고 있다. 조선인 어업의 규모가 작은데도 많은 노동력이 밀집해 있는데, 자본이 부족한 영세어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1930년 감포는 예기·창기작부는 26인이나 있는데, 요리점이나 음식점이 없다고 되어 있다.


화면 캡처 2025-05-03 194907.jpg <표-어업기 다수의 어업자 및 상인 등이 모여드는 지역(젠쇼, 1933:776)>


이렇게 폭발하는 일본인 인구로 인해, 위생 문제도 불거졌다. 특히 감포항은 인구가 조밀하여 가장 식수 사정이 좋지 않았다. 강수량이 적고, 위생상 위험하여 공동우물도 부족하여, 1931년부터 상수도 공사에 착수했다. (젠쇼, 1934:392) 감포는 만성적인 물부족으로 현재는 감포댐을 건설하여 충당하고 있다.

이상, 1930년대 자료를 보면, 감포는 어업의 활황과 함께 폭발적으로 일본인 인구가 늘고, 그 인구들이 현재의 감포읍내 중심으로 몰려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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