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감포항만 축조공사 (1917-1928)
감포의 항만은 조선총독부에서 1917년 감포어업조합에 항만축조허가를 내주어 축항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축항기성회 중심으로 1922년에 3개년 계획으로 공사를 계획하고 1924년부터 항만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25년 12월 완공 예정이었다. 그러나 1925년 9월의 태풍으로 항만이 대거 유실되어 결국 1928년에 감포항 방파제 축조공사 준공인가가 났다.(<관보>(0501호,1928.8.28,1926.9.3)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1925년 항구 완성을 염두에 두고 조선총독부가 감포를 지정항으로 지정하였지만, 실제는 태풍으로 항만이 크게 파손되어 공사기간이 연장되고 1928년에야 항만공사가 끝난 듯하다.
항만이 대규모 건설사업이어서, 공유수면 매립을 통한 항만 부지를 확보하고, 부두, 창고, 세관시설 등 항만 관련 시설을 건설하고, 건설된 항만의 경영과 유지, 보수, 확충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배석만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식민지의 안정적 경영이라는 차원에서 조선과 연결고리가 되는 항만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국가적 차원의 개발과 관리통제를 필요로 했기때문에, 조선총독부도 1914년부터 항만의 건설과 관리, 경영에 대한 국가의 감독 필요성에 의해 법규를 제정하고, 관련 업무를 총독부 여러 부서에 나누었다고 한다. 1920년대까지는 항만 관련 업무 권한이 조선총독에서 각 지방장관으로 위임되고 행정 권한도 지방자치단체로 이양되었다고 한다.
처음 감포에 이주한 어민들은 개인적으로 왔으나, 1917년부터는 후쿠이현 어민들의 집단이주가 본격화된 것이 요시다의 자료에서 드러난다. 1917년에 축항기성회 조직과 조선에 정주하여 어업에 종사하는 집단이주민들이 등장한 것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어 운반업자들이 감포에 사무실과 창고를 지어 어업근거지로서 윤곽을 드러낸다. 이와 관련해서 1917년 9월 29일자 「조선시보」 기사가 흥미롭다.
▲감포의 발전
생어(生魚) 매입상 오히데구미(大秀組)는 사업을 확장하고 감포에서 중요한 토지를 매입하여 목하 2층사무소, 숙사 및 창고를 건축중인데, 하야시가네구미(林兼組), 야마가미구미(山神組)도 또한 각각 이미 부지 매입을 완료하고, 가을까지는 사무소 및 창고 등을 신축하기로 한 모양인데, 이번 추어기(秋魚期)보다는 크게 이 지역의 발전을 볼 것이라고 예기할 수 있다.
▲정주어업자
작년까지는 5월 이후는 이 땅에 어업자가 한 사람도 남지 않아, 상당히 쓸쓸한 느낌이었는데, 금년은 후쿠이(福井)어업단, 이세구미(伊勢組)통조림제조소를 비롯해 정주 목적으로 온 자가 많고, 고등어유망(鯖流網) 10척, 연승선(延繩船, 필자주-주낙) 6척은 현재 날마다 종어(從漁)중이다. 연승선과 같은 배들은 올봄에 처음 왔는데, 9월부터 4월까지는 도미나 갈치를 잡고, 여름에는 아나고나 가자미를 잡는 배들로, 목하 어획고 매달 평균 이백원(二百圓) 내외인데,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는 매달 육백원 내외로 오를 것임에 틀림없는 소자(小資) 유망한 어역이다.
▲축항기성
감포의 축항은 드디어 실행하기로 결정되어 기성회장 다쓰노 산노스케씨, 부회장 스와키 라쿠조 양씨는 열성적으로 이 일을 맡아, 빠른 완성을 기대하여, 착착 진행중인데, 재주자 일동 크게 기대하는 중이다.
이 기사는 본격적으로 식민이주어촌으로 나가는 감포의 상황을 알려준다. ‘감포의 발전’이라 기사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일본인의 감포가 발전하는 것이지, 조선인들에게도 ‘발전'이었는지? 1917년에 이미 오히데구미라는 생어 매입상 즉 일본 어민들이 잡은 생선을 집하하여 부산이나 일본으로 운반하여 판매하는 운반업자가 토지를 매입하여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을 기사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이전, 감포에 출현한 일본 어민들 대다수는 생선이 나는 계절에 조선으로 넘어와 집중적으로 조업을 하고, 휴어기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1917년에 이후에는 감포에 정주하여 어업에 종사하는 방식이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쓰노 산노스케가 이끌던 후쿠이 어업단이 감포의 첫 집단이주민들이다. 철새에서 텃새로 감포를 새로운 고향으로 발견한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 정주한다는 것은 조선의 토지를 구입하고, 집단을 이루어 촌락을 형성하고, 그들의 교육, 치안, 교류를 위한 네트워크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기사에는 1916년까지는 어업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하나, 1914년 조사에는 5가구가 있었으니, 이들은 어업종사자가 아니라, 어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요리업, 여관업과 같은 기타 업종에 종사한 일본인들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진행되면서, 군인, 관리, 상인들의 뒤를 이어, ‘가라유키상’과 같은 유흥업에 종사하는 다수의 일본인 여성들이 해협을 건너왔다.
일본인이 식민어촌을 형성하여 정착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어업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조건, 배를 댈 수 있는 항만을 구축하는 것인데, ‘축항’사업을 실행할 기성회가 1917년에 조직되었다. 중요 인물은 선어운반업자 오히데구미와 후쿠이 어업단 소속의 다쓰노와 철공소를 운영한 스와키이다. 하야시가네구미, 야마가미구미와 같은 일본인 어업자본의 이름이 있는데, 둘 다 1930년대 감포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감포에서는 오히데구미가 가장 세력을 넓혔던 것 같다.
1922년 (다이쇼11년) 말에 이르러, 공사비 26만 엔으로 포용면적 1만 1천 평을 가진 사석방파돌제(捨石防波突堤) 연장 90칸의 공사에 착수하여, 1925년(다이쇼14년) 10월 경 완성이다.
(<朝鮮及朝鮮人 朝鮮港灣號> 제5권 12월호, 1925:132)
1924. 9. 6 감포 앞바다 매립 허가
총독부는 경상북도 경주군 양북면 감포리 앞 해면 2,823평 여의 매립을 도이구치(渡井口淸太郞) 외 30명에게 허가하였다. (<官報> 1924.9.6)
1925년 1월 16일에 감포는 ‘지정항’으로 고시되었다.
현재 감포항은 국가어항이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 조선총독부령 제41호’를 단서로 1925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3호로 감포를 조선총독부의 권한에 속하는 항구인 ‘지정항’ 20개 중 하나로 정했다. 따라서 2025년이 감포 개항 100주년이다. 항구 범위는 ‘송대말부터 남서대안 돌단(南西對岸突端)으로 이어지는 일선(一線)이내’로 규정했다. 구룡포, 도동항 등이 이때 함께 지정되었다. (<관보> 3724호,1925.1.16.)
지정항이란 총독부의 감시감독 아래 관리되는 공인된 항구라는 의미이다. 당시 항만의 분류와 의미는 조금 혼란스럽다. 젠쇼의 �조선의 인구연구(朝鮮の人口研究)�(1925)에 따르면, 조선의 항만은 ‘개항, 준개항, 지방항’으로 나뉘는데, 감포는 ‘지방항’으로 분류되었다. ‘개항’은 부산, 인천과 같은 항구, ‘준개항’은 ‘세관의 특허로 조선, 대만, 사할린 사이에 선박 출입이 가능한 항구’로, 마산, 행엄, 평양이 있다. ‘지방항’은 ‘어업근거지로서 도내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타도에서 입어선 또는 내지통어선의 출입, 정박하는 일이 많고 그 이용이 넓은 곳’으로, ‘조선 연안에서 어선피난항의 총수 300여 개소 중 특히 수축(修築)을 가장 긴급하게 요하는 항구’이다. 그중에 감포, 포항, 구룡포가 들어 있다. 지방항이면서, 조선우선주식회사의 선박기항지이다. (젠쇼,1925:125-130)
그런데 마찬가지로 1925년 발간된 �조선 및 조선인(朝鮮及朝鮮人)� 제5권 12월호에는 개항, 관세지정항, 지정항으로 나누어 항구를 소개하고, 감포는 지정항에 포함되어 있다.
또 1944년 자료를 보면, 조선의 항만은 개항, 지정항, 관세지정항, 지방항 4가지로 분류되어 있고,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항구 성격에 변화가 있다.
첫째가 개항(開港)으로 외국과 통상항으로 개방된 항구로, 일반적으로 주요 항구들 대부분이 개항이다. 대규모 항만이 개발되고 배후에 해안 도시가 형성되는 지역은 거의가 개항이다. 1944년 말 현재 총 14개의 개항이 지정되었는데, 부산, 인천, 원산, 목포, 청진, 진남포, 신의주, 용암포, 군산, 해주, 다사도, 성진, 웅기, 나진이다. 둘째는 지정항(指定港)으로 항만의 공사, 시설물 설치 등 항만과 관련된 제반 행정상의 처분이 조선 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항구이다. 최초의 지정항은 여수, 포항, 삼천포, 겸이포, 장전, 서호진, 신포, 웅기의 8개 항구였으나 이후 증가하여 1944년 말에는 총 38개 항구가 지정항이 되었다. 셋째는 관세지정항(關稅指定港)으로 개항 이외에 조선 총독의 지정으로 일본과 대만, 사할린 및 남양군도와의 사이를 오가는 선박이 출입 가능한 항만을 지칭한다. 당초 19개 항구가 있었으나 1944년 말 현재 9개항으로 축소되었다. 방어진, 마산, 진해, 통영, 여수, 성산포, 포항, 도동, 서호진이다. 넷째는 지방항(地方港)으로 앞선 개항, 지정항, 관세지정항을 제외하고 어항(漁港)까지 포함하는 모든 항만을 지칭한다. (朝鮮總督府 交通局 <朝鮮交通狀況 第一回> 1944.11, 208~212쪽, 배석만:374에서 재인용 )
실제는 1925년 9월의 태풍으로 공사중이던 방파제가 대부분 유실되는 큰 피해를 입는다. <부산일보>(1925. 6.3)기사에 있듯이, 감포 방파제는 돌을 붓는 사석공사만 하고, 콘크리트를 붓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착공한 구룡포항은 콘트리트를 상부에 부어 태풍에도 유실이 적어, 이후 감포항을 재축조할 때에는 콘크리트를 붓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부산일보」1925.9.3)
감포는 1925년에 지정항으로 지정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1944년에는 지방항이었다.1930년대에는 조선우선, 조선증기선의 정기선이 취항하고, 남쪽으로는 방어진, 장생포, 부산, 북으로는 포항, 원산에 이르는 요충지로서 화물과 승객의 운송편이 있었다. (젠쇼,1934:68-9) 부산이나 원산, 청진에서 환승하면, 일본이나 중국으로도 이어졌다. 어느 쪽이든 감포는 조선총독부의 관할아래 있는 항구였다. 조선 연안의 항로를 정기적으로 기항하는 바닷길과 연결되고, 국제우편과 화물운송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국의 판도를 확장하면서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이나 일본 통치하의 또 다른 식민지와 전쟁터로 직접 인적, 물적 자원을 직접 연결하는 바닷길을 확보하고자 했다.
⑥ 1930년대 어업의 활황
1930년대 감포는 어업이 발달하여 점점 이주어촌으로서 커지면서, 당대 자료에는 항만 정비와 관련된 내용과 어업에 대한 기사가 많다.
1930년 7월 18일 「부산일보」에 따르면, 1926년에 완성한 방파제가 다시 태풍으로 대량 유실되었다. 감포어업조합이 주도하여, 1931년부터 3개년 계속사업으로서 당시 약 50만 원을 투자하여, 연장 273미터에 달하는 방파제를 다시 건설하기로 하였다. (젠쇼, 1934:460)
또한 1933년 11월에 송대말 등대에 등간을 건설하고 11월 21일부터 점등하기로 하였다.(「관보」2051호, 1933.11.9.) 1935년 2월에는 감포항 남방파제에 등대를 신설하여 2월1일부터 점등하기로 하였다. (「관보」2409호, 1935.1.25.)
1924년에 매립허가를 받은 이후, 감포는 시가지가 협소하여 지속적으로 매립이 이루어졌다. 1935년 7월 5일에 감포어업조합이 해안 매립 공사의 입찰을 실시하였다. 1935년에도 감포어업조합이 1500평의 매립허가를 받고, 7월 7일 착공하여, 11월 20일까지 준공 예정으로 해안도로에서 해면까지 남북으로 90미터, 동서 60미터를 예정했다. 그러나 매립 사업은 지연되어 1936년에 완성되었다. 구룡포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보아 1930년대 지도에 표기된 매립신마치 1, 2정목은 1920년대 매립이 된 지역이다.
1937년 7월 1일, 감포는 경주군 감포읍(8개리)으로 승격되었다. 일본인 인구가 감포보다 더 많은 구룡포가 1942년에 읍으로 승격된 것과 비교하면, 1937년 감포의 읍 승격은 파격적으로 보인다. 인천 제물포도 이때 읍이 되었다. 「부산일보」(1936.12.29)에는 ‘감포읍제 실시에 1936년 마지막 맹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읍 승격을 위한 일본인들의 노력이 실려있다. 감포번영회장 도이구치, 부회장 야마자키, 학교조합 관리자 미즈시마 등 유지들이 1936년 12월 22일에 경상북도에 올라가 읍제 실시 필요성과 빠른 시일 내 실현 방법을 진정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감포 내 일본인들이 읍 승격을 몹시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군 양북면 감포리에서 경주군 감포읍으로 변화되는 것은 단순한 행정구역상의 변경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일본인 중심의 식민이주어촌의 성격이 강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부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후, 1931년 4월 1일의 법령 개정으로, 면을 읍과 면으로 세분하고, 읍에도 의결기관인 읍회의가 설치되어 부(府),·읍(邑)은 일본의 시정촌과 동등한 수준의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당시 읍회 선거의 선거권은 그 자격 기준이 국세 5원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최유리,1997:242) 읍은 의결기관인 읍회의를 가진 거의 완전한 자치단체이나, 면은 이와 반대로 읍장의 자문기관으로 면협의회를 두고 있는 데에 불과하였다. 읍회의는 읍에 관한 중요한 사안을 의결할 수 있었으나, 면협의회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자문을 받는 것에 그쳤다. 읍회의나 면협의회 의장은 읍, 면장으로 충당하는 제도이며, 임기는 4년으로 정족수는 8-14명이었다. (<경주시사> 2편, 353)
당연히 읍회의에 세금을 많이 내는 재력가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형식상으로는 각 지역의 자치권이 확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감포읍이 되면서, 감포의 경제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의 입김이 지방자치에 더 크게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2년 말 읍면경비 중 세입, 세출 규모를 보면, 감포가 읍으로 승격되는 데는 경제적 이유가 컸다. 경주읍의 읍면세가 22,765원, 재산세수입이 722원인데, 감포가 포함된 양북면 읍면세가 12,192원, 재산세수입이 757엔이다. 양남면은 읍면세 6,608원, 재산수입 564원이다. (젠쇼,1934:508) 감포는 경주군내 4위이다. 인구나 면적에 비하면 세금 수입이 높다. 1930년대 신문 지상에 감포에서 고등어, 정어리 대풍이라는 기사가 빈번한 것처럼, 감포 어업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을 조선인이 많은 양북면에서 분리시켜, ‘일본인만의 감포’를 지향한 의도로 볼 수 있다.
⑦ 1940년대 정어리어업 쇠퇴
전쟁기에 들어가면 신문의 통폐합과 전시물자 부족탓인지, 신문이 많이 남아있지 않고, 이 시대의 양상은 신문기사에도 전쟁 기사 일색이다.
「일제강점기 동해 어족 자원의 수탈과 활용」에 따르면, 1920년대 중반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정어리 어업은 1930년대 후반에 정점을 찍었다. 1937년에는 정어리 어업을 통해 거둔 막대한 어획고를 기반으로 조선의 정어리어업은 세계 2위 어획고를 차지할 정도였다. 여기에는 1910년대부터 40년대 초까지 동해 지역에 다량으로 回遊한 정어리 무리의 존재와 1910년대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 일본의 유지공업의 발전이라는 공급과 수요가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942년 이후 동해안의 정어리 어획은 급감했다. 일본의 유지공업은 주로 우지(牛脂)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으로 인해 대체 원료를 찾게 되었다. 이때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어유(魚油)를 기반으로 한 경화유(硬化油)였고, 어유 및 경화유의 생산을 위해 풍부한 지방을 함유하고 있는 정어리가 대량으로 어획되었던 것이다. 한편 경화유 가공공업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였다. 경화유 분해 과정에서 생성되는 글리세린이 화약의 원료였기 때문이었다.
정어리어업의 발전이 유지ㆍ화학공업 및 토목ㆍ전기 산업 발전과 이어졌던 만큼, 동해안의 정어리어업은 식민지조선의 공업, 군사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을 했다고 할 수 있다.
⑧ 1945.8.15 패전과 귀환
식민지 조선에 있었던 약 70만 명 이상의 일본인들은 패전으로 일본으로 쫓겨가야 했다. 이를 역사적으로는 일본에서는 ‘인양(引揚, 히키아게)’이라 한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귀환’ 정도의 의미이나, 패전으로 집단으로 해외 식민지에서 일본 본토로 돌아가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인양’은 침몰한 배를 끌어올리거나 할 때 쓰이는 용어인데, 해외의 일본인을 적지에서 구해낸다는 뉘앙스가 이 단어에 있다.
식민지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의 귀환 과정은 고단했고, 고국에 돌아가서도 이미 본거지가 식민지였던 이들은 정착이 쉽지 않았다. 패전후 일본인들의 전쟁에 대한 ‘피해자의식’ 중 하나가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이 ‘인양체험’이 있다. 1930년에 1000명 전후였던 감포 일본인들의 인양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패전으로 감포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기선저인망 선박을 조선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2020년 개항 100주년 맞는 감포항 개항사」「경주신문」2017.1.19.) 경성, 대구와 같은 도시부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철도로 이동해서 부산과 같은 항구에서 인양선으로 귀국했지만, 감포의 일본인들은 대부분 항구라는 입지를 활용해서 어선으로 귀환한 듯하다. 일본으로 귀환시 제한이 있어, 재산이나 화폐를 다 지참하지는 못했고, 그것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패전 당시를 기억하는 경주의 한국인은 이렇게 회상한다.
일본인들은 경주역을 함부로 이용못했습니다. ‘짐을 다 뺏긴다.’면서 자동차로 가거나 밤에 떠나고, 감포나 부산 등지로 몰래 배를 구해서 갔습니다. 일본 관리들은 문서를 파기했고, 시바타 단쿠로와 구리하라 같은 사람은 골동품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거의 못 가져갔을 겁니다.
(김기조 구술 <남기고 싶은 이야기>, 경주문화원, 2017)
패전으로 한반도의 권력상황이 역전하면서, 일본인들은 생명의 위협과 식민지에서 쌓아올린 부를 두고 일본으로 쫓겨가야 했다. 식민지배의 종식이 가져온 역전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삶의 터전을 식민지에 구축하고 있었지만, 그 일상이 식민지배의 위태위태한 질서 위에 세워진 것 임을 8.15 후에 실감했을 것이다.
이상이 감포 일본인들의 간략한 역사이다. 개항과 함께 감포의 역사는 식민의 역사를 걸어 왔다. 적극적으로 조선인이 개항을 한 것도 아니고, 물고기떼를 쫓아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이 그들의 부를 축적하고자 항만을 건설하였고, 조선총독부는 지정항으로 지정했다. 감포 일본인의 흔적을 더듬으며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감포의 근대는 한반도의 근대가 그러했듯이, 식민의 역사와 함께 출발했고, 그 식민의 현장이었다. 관광자원으로 뱐화된 벽화가 그려진 담벼락, 일본인 가옥의 흔적은 감포의 ‘그 때 그 시절’의 일본인들의 식민의 기억과 흔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