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오는 일본어민들

by 뚜벅이

<경주시사>에 따르면, 가가와현에서 집단이주한 일본인들이 만든 정통성 없는 ‘이민촌락’이 일제 시대 감포였다. 과거부터 조선인이 거주한 지역이 아니라 새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만든 마을이어서 조선인들 시각에서 보면 정통성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 감포에 조선인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업을 하는 해안가 쪽에 조선인이 적었고, 논밭이 있는 농촌 지역에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감포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가가와현(香川縣) 출신이 많았다. 가가와현은 옛 사누키(讃岐) 지방으로 사누키우동이 유명한 곳이다. 감포 앞바다는 사회 교과서에도 나와 있듯이 대륙붕이 잘 발달하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어족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일본인들은 어업 자원획득을 목적으로 감포를 어업전진기지로 삼아, 새로운 방파제를 만들고 매립을 하여, 협소한 항만을 확장하고, 시가지를 만들어 그들의 공간을 만들며, 식민지로 침입했다. 부산에서부터 북상하여 방어진(울산)-감포-구룡포-포항-울진-청진으로 일본인들은 항구를 개발하고, 일본인 이민촌락을 만들었다.


그렇게 항구가 열렸다.


이러한 이민촌락을 박정석은 ‘식민이주어촌’으로 부르고, 이 공간은 일본인만을 위한 거주 공간으로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이주어촌을 건설한 배경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식민정책의 일환’이다. 단순히 조선해의 수산자원을 포획하고 이용하려는 차원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요충지에 일본인을 이주시켜, 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일본의 전략적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본 어민들의 이주는 지리적으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공간을 이동했던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에 따라 특정한 사람들을 특정한 공간에 이주시켰던 ‘식민’이었다. (박정석, 2017:61)


<그림 1- 일본에서 감포로 온 일본인들의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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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에 표시한 것처럼, 일제 시대 일본인들은 전복, 도미, 삼치, 고등어, 정어리 같은 물고기 떼를 쫓아 멀리 일본의 미에, 도쿠시마, 가가와, 오카야마, 후쿠이에서 세토내해를 지나 시모노세키를 거쳐 감포로 진출했다. 그들의 출신지는 근대 일본의 발전에서 뒤처진 지방 어촌지역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어떻게 이들은 먼 감포까지 흘러왔을까?

감포에 정착한 일본인 식민의 역사는 <경주시사 4편> 제5장 수산업 편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①1904-1905년 경까지는 해안을 향한 바닷가에 약 50호 정도 한국인 촌락이 있어,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한편, 어업에도 힘썼으나 빈약한 장비에다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②1905년 경부터 비로소 일본인 어부들이 봄, 가을로 왕래를 시작하여 그 수가 연차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에 저인망을 시험하여 삼치 등 많은 어획고를 올림으로써 유망한 어장으로 알려져

1908-1909년 경에는 일본인 몇 가구가 이주해 왔다. 그 후 이주자가 점차 불어나게 됨에 따라 한국인 거주자도 차츰 증가하게 되었다. (중략)

어획량이 늘어나고 어업 활동이 증가하게 됨에 따라 항만수축이 필요하게 되어 ⑤조선총독부에서 감포항만 축조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1차 공사가 ⑥1930년의 대 폭풍우로 유실됨에 따라 총공사비 875,000원을 투자하는 대규모의 공사를 벌여 1935년에는 현대식 감포항만을 축조하게 되었다. (657-658, 번호와 밑줄은 필자)


자료에 따르면, 근대 감포 일본인의 역사는 러일전쟁 전후로 시작되었다. 위 인용문에서 번호를 매긴 중요한 연도들을 다른 자료들과 검토해서 연표로 보충해 본다.


① 러일전쟁(1904-1905) 이전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개항(開港)하게 되었고, 일본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은 조일통어장정(1889)을 체결하였다. 이 통어장정은 일본인들에게 전라·경상·강원·함경의 4도 해역에서의 어업 활동을 정식으로 허용해 주는 것이어서, 조선의 어업 자원을 일본이 합법적으로 침탈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통어(通漁)’란 물고기가 많이 나는 일정 기간 동안 어장에 출어해서 선상에서 생활하며 어로를 하고, 이후 어획한 물고기를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시기에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왔다 갔다 한 시기이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의 집단이주를 권장하고 지원했다. 1899년 처음으로 거제도 장승포에 에히메현의 지원으로 ‘에히메촌’이라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형성되었다. 그래도 아직 동해안에는 척수가 많지 않았다. (박정석, 2017:66)

② 러일전쟁 이후

타국에서 러일전쟁을 치르던 일본은 군대에 제공할 식량 보급이 급선무였다. 이로 인해 군용 식량 보급을 목적으로 조선 해역 전체를 개방할 것을 요구했고, 조선은 받아들여야 했다. 일본 정부는 마산, 거제도 장승포, 인천 어청도 등지에도 식량 공급을 위한 식민이주어촌을 건설했다.

이 움직임에 연동하여, 변변한 산업이 없고, 가난한 일본 내 지방 정부들은 서둘러 지방비를 지출하여 조선 해안을 조사하고 이주어촌 건설지를 확보하여 이주 계획을 진행시켰다. 대표적으로 가가와현의 경우, ‘가가와현수산조합’을 만들고 1906년에서 1909년까지 925엔~5,064엔을 어민에게 이주자금으로 보조하였다. 그 지원으로 거제도 지세포에 토지 1만 평을 구입하여 이주민 주택 30호와 감독, 교원, 순사 주택 각각 1호를 건설하여 어민을 모집하였다. 가가와현수산조합이 1909년까지 어업근거지로 선정한 곳은 61개 지역이었는데, 동해안 연안은 울산, 감포, 년포, 구룡포에서 함경도 웅기에 걸쳐 있었다. (김수희, 2005:141) 가가와현의 어업근거지의 하나인 감포에 일본인 어민들이 등장하였지만, 아직은 성어기의 계절성 왕래가 대다수이고, 정착하는 일본인은 많지 않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로 중국으로 제국주의의 판도를 넓혀간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의 해역에 출현한 것은 다른 자료에서도 공통된다.


본군(=경주군)에 있어서 수산업의 기원은 전거할 기록이 없지만, 연안어업은 오래전부터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어구어법은 1904, 5(명 37,8)년 내지인 통어(通漁)자가 왕래하기까지 극도로 유치하였고, 그 후 점차 내지인 어업자의 이주에 따라, 조선인 어업자의 어구, 어법도 그 자극과 지도를 받아 일반적으로 진전하였다. 한편 가공수산품 같은 경우도, 종래 전혀 진화되지 않았지만, 1921년에 기술원이 배치됨과 함께, 내지인 당 업자의 유도와 함께 여러 해 품위의 향상과 제품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젠쇼 에이스케, 1934:455-456)

이 시기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어업은 일본의 어업과 비교하여 영세하고, 기술적으로도 높지 않았다. 그러니 일본 어민들에게 조선의 바다는 손타지 않은 노다지와 다름없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어장을 노리고 이주한 어민들이 증가한 것이다.


③ 1907년 무렵

하야시가네구미(林兼組)라는 대규모 어업자가 1907년 구룡포로 본거지를 옮겼다. 구룡포에 식민이주어촌을 세운 가가와 출신들은 감포의 초기 정착자들과 같은 지역 출신자들이 많아, 그 방식, 시가지 구성, 산업 분포도 대단히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1908년 무렵에는 일본 어민이 봄가을 일본에서 감포로 왕래할 뿐이었다. 감포에 온 일본인 대다수는 계절성 고기잡이 어민(通漁者)들이었다. 아직 자신들의 근거지는 일본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1910년 한일병합으로 식민지 조선이 되자, 조선으로 정착을 목표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급증했다. 물론 일본의 국가적 시책도 지원된 것이다.

감포는 고등어, 삼치어업이 유망하다고 알려지면서 해마다 통어자와 이주자가 늘어 천명 내외에 이르렀다. 이후 봄가을 성어기에 일본에서 온 통어자가 7천 명, 선어운반업자까지 합치면 1만 명에 이르고, 어획고는 연 2백만 원에 이르렀다.(朝鮮及朝鮮人社 <朝鮮及朝鮮人 特輯 朝鮮港湾號> 제5권 12월호, 1925.12, 1925:131-132)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 이주자가 늘기 시작했다.


요시다 게이이치의 <조선수산개발사>(1954) 부록, <조선주요이주어촌연표>에서는 감포를 <후쿠이촌>으로 부르고 있다.

화면 캡처 2025-05-01 180823.jpg <표 1-요시다 게이이치 저, 박호원, 김수희 역 <조선수산개발사> 민속원, 2020, p.617-618의 표를 간략화>

위 요시다의 글을 <경주시사>와 대조해 보면, 식민어촌 감포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1905년경에는 가가와현 오타촌 삼치잡이 어민들이 계절성 어업 (통어)를 하는 근거지가 되었다는 것, 이후 1914년 후쿠이현다쓰노 산노스케가 중심이 되어 이주하여 게잡이를 하였다는 것, 1916년에는 거주자가 65호까지 늘었고, 후쿠이현이 중심이었다는 것, 감포의 발전은 고등어와 정어리 어업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으로 감포는 구룡포와 마찬가지로 가가와현 출신이 지배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요시다는 후쿠이현 출신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한 점이다. 가가와현 출신들이 통어로 자유이주하여 감포에 먼저 정착하고, 뒤이어 후쿠이현 출신들이 집단이민으로 대거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요시다는 동해안은 자연환경이 특수해서 영세한 어업으로는 이주어촌이 발생하여 발달할 여지가 없어, 남해, 서해안과 매우 다르게 이주어촌이 형성되었다고 했다. 동해안 어업의 본격적 발달은 1920년대 중기 무렵부터 동력화, 어항 시설의 완비에 따른 기업적인 경영이다. 물론 잠수기업자를 선두로 삼치유망, 고등어어업자, 정치망업자 등이 통어시대부터 진출하여 약간의 영세한 자유이주어촌은 일찍부터 발생하였고 이들이 이주어촌의 근간이 되었는데, 동해안 이주어촌에는 일본 서부 연안의 출신자가 많았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요시다, 2020:391)


④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1914년 감포는 장기군에서 경주군 양북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조선에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을 추진했다. 행정구역 통폐합은 식민통치를 위한 정책이었고, 이에 따라 자세한 측량과 지도 제작, 국세조사가 이루어져, 다양한 식민지 통계자료가 산출된다. 감포 관련 통계들도 1914년 이후가 대부분이다.


아래 지도는 1914년 경주군으로 편입된 이후 감포 지도이다. 감포의 지형과 함께 이미 기항소, 순사주재소, 우편소, 일본인 학교라는 네 장소가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14년 조사에서 감포에 정착한 일본인은 남 5인 여 7인 합 12인의 5호가 있었다. (김수희, 2005.6:141) 물론 이 숫자에 봄가을로 드나드는 수백 명의 계절성 어민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필수적인 생계를 위한 항만과 자신들을 지켜줄 경찰 권력, 본국과 연락하기 위한 통신, 장기적인 정주를 목적으로 2세 교육을 담당할 학교를 제일 먼저 세웠다. 예를 들어 1913년 2월 14일 감포우편소가 개소(구룡포는 1913.10.11) 되었다. 1931년에도 우편국은 경주, 우편소는 감포, 안강, 건천, 아화의 4개소 밖에 없었다.(젠쇼, 1934:69) 우편소도 인구가 많은 조선인 거주지가 아니라, 일본인 집단이민촌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확인된 일본인이 단 5호밖에 되지 않은 데도 우편소가 세워졌던 것이다. 1930년대 지도에서는 감포 시가지가 많이 정비되어, 주재소, 우편소, 학교의 위치가 달라져 있고, 항만도 매립되어 확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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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조선 오만분일 지형도-경주」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1914 측량, 1918 발행](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위 지도는 1914년에 일본이 측량한 오만분의 일 경주 지도 중 감포의 일부이고, 아래 지도는 현재 지도 위에 일제 시대 지도를 포개본 것이다. 1914년에 송대말 바위나 척사의 바위, 현재 남쪽 방파제 근처 바위까지 자세하게 측량하고 있다. 기항소 표시는 있지만, 천연 바위를 이용하였을 뿐, 아직 방파제는 건설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경주 지역을 답사하면서 찍은 감포 사진이 있다. 1930년대의 감포 시가도와 비교하면, 사진 속의 감포 해안가는 방파제도 아직 없고, 나무판자로 된 집들만 드문드문 있는 한산한 어촌으로 보인다. 사진은 감포 해안가 전경에 포커스를 맞춰 주인 없는, 개발되지 않는 장소임을 부각해, 일본인들에게 식민지로의 꿈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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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경북 경주 감포읍 전경>(출처: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002303, 건판 002302)



<참고 자료>

1. 이하 연재 중 본문에서 사용한 일제 시대 감포 관련 사진의 출처는 대략 다음과 같다.

- 善生永助 <調査資料 第40集 生活實態調査(其七) 慶州郡>(朝鮮總督府,1934) 부록

<朝鮮の聚落(前)>(朝鮮總督府,1933)에 실린 감포 관련 사진

(동일 사진을 경주문화원 홈피에서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박물관 유리건판」

<大日本職業明細圖 朝鮮南部>(東京交通社, 1930) 내의 사진

「釜山日報」

필자가 촬영한 사진

2. 일제 시대 감포 관련 주요 통계 및 인명, 산업에 대한 자료는 아래를 참고했다.

<경주시사>1-4편, (경주시, 2007)

善生永助 <朝鮮の人口研究>(朝鮮總督府,1925)

________<調査資料 第40集 生活實態調査(其七) 慶州郡>(朝鮮總督府,1934)

________<朝鮮の聚落(前)>(朝鮮總督府,193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내 전자자료

행전안전부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전자자료

예) <조선총독부관보>, <조선공로자명감>, <조선회사조합자료>, <朝鮮港湾>, 일본어 신문 「釜山日報」, 「朝鮮時報」(이후 「朝鮮新聞」) 등

3. 중요한 자료, 사항은 굵은 글씨로 강조하였다.

4. 현재는 사용되지 않으나 당시 사용되던 역사적 용어는 오늘날 용어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있다.

예)내지인(=일본인)

5. 당시 일본어 자료 중에 번역문이 별도로 없는 경우에는 필자가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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