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고장

by 뚜벅이

박경리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렀다. 예전 고향 초등학교 선배를 만났더니, 대학 친구들에게 감포를 ‘한국의 나폴리’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감포 ‘깍지길’을 걸어보니, 과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깍지길 1구간의 오류 고아라해변에서 송대말 등대를 지나 감포항까지 약 5km 구간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이었구나. 그럼에도 절경에 비해 쇠락해 가는 어촌의 풍경도 공존했다.


인터넷 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해안을 따라 도로와 시가지가 밀집해 있으며, 도내 주요 어장의 하나인 감포항이 있다. 감포항은 군내 유일의 어항이나 교통 조건이 불리하여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앞바다에서는 꽁치·대구·멸치·오징어 등이 주로 잡힌다. 감포·송대말 등대가 있으며, 감은사지, 감포영성, 문무왕, 해중릉, 봉길해수욕장 등의 관광지가 있다.


작은 어촌이지만, 감포는 유서 깊은 <삼국유사>의 고장이다. 만파식적의 전설이 담긴 기림사, 감은사와 문무왕릉(대왕암)의 유적을 지금은 문무대왕면이라는 좀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구 양북면과 공유한다. 천 년 전 신라 시대부터 왜구를 막기 위해 감은사를 세우고 죽어서도 동해를 지키고자 한 문무왕의 수증능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이 ‘왜’ 즉 ‘일본’과 긴 인연이 있는 것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가장 가까운 앞바다라는 연유일 것이다.

감포는 20세기에 장기군 내남면, 경주군 양북면, 경주군 감포읍, 월성 군 감포읍, 경주시 감포읍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현재 감은사는 양북면에 속하고, 대왕암은 감포읍 봉길리에 속한다. 바로 아래는 경주군 양남면이다. 1시간 거리에 북으로 포항, 서로 경주, 남으로 울산이라는 트라이앵글이 감포의 생활권이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993:156)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들어, ‘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은 경주에서 감은사로 가는 길, 흔히 말하는 감포가도’라고 했다. ‘불과 30km의 짧은 거리이지만 이 길은 산과 호수, 고갯마루와 계곡, 넓은 들판과 강,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조국 강산의 모든 아름다움의 전형을 축소하여 보여준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이 굽이굽이 아름다운 ‘감포가도’는 1933년에 경주-감포 간 3등 도로로 완성되어 1일 3회의 자동차 정기운행이 이루어졌다. (<경주시사> 제2편, 2007:364) 현재는 터널이 생겨 예전과 길이 달라졌다. 인구의 이동과 물류를 담당하던 감포가도의 기능은 자동차가 늘고 좁은 길이 불편해서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경주에서 전촌까지 더 넓고 곧은 도로가 생겼다. 굽이굽이 꼬부랑길인 추령재는 늘 나에게 지독한 멀미를 안겼으나, 이제 추령재를 넘어가는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새 도로는 원자력발전소 때문이라고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1983년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양남에 건설되었고, 국내에서 가장 위험한 원자력발전소의 하나라는 오명을 안고 1호기는 가동중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저준위 방사능폐기물을 처리하는 방폐장은 문무대왕면에 건설되었다. 원자력발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와 마찬가지라는데. 용이 드나든다는 감은사와 대왕암 지척에 방폐장을 세운 후손을 조상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식민지 시기 감포를 알려주는 자료들


20세기 초 감포의 역사는 엄청나게 변화한다. 석굴암 본존불이 바라보는 바로 그 바닷가에 일본인들이 물고기 떼와 함께 대거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C자 모양의 항구인 감포에서 직선을 그으면 일본의 시마네(島根) 현 마쓰에(松江) 언저리에 닿는다. 지도상 북위 약 35.5°. 감포 송대말 등대의 위치는 북위 35도 48분 30초.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나오는 시마네현은 감포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이다. 따라서 시마네현에서 해류와 물고기를 따라오면, 독도, 구룡포, 감포에 닿는다. 신라 시대에도 동해를 건너 한국과 교류한 일본이니,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마자, 감포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넘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제국주의는 농업이민, 어업이민, 개척이민이라 하여, 일본의 농산어촌 지역에서 식민지 조선과 만주, 타이완의 여기저기로 집단이주를 권장했다. 일본에서의 살림살이가 팍팍하여, 일본의 가난한 농어촌에서 이주한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또 나중에 패전 후 집단 인양(引揚: 일본에서는 패전 후 일본의 밖에 있던 일본인들을 집단적으로 일본열도로 귀환시킨 역사적 경험을 引揚(인양)으로 표현한다)하는 이들이 되었다. 이들을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이라 흔히 ‘재조일본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조선과 일본의 양쪽에 걸친, 이중적 존재였다. 식민지조선에서 악착같이 부를 축적한 침략의 말단이자, 패전 후 일본에서는 식민지에서 잘 먹고 잘살다 돌아온 반갑지 않은 불청객으로 차별받기도 한 존재들이었다. 모리사키 가즈에라는 대구출생 일본인 여성 작가는 그러한 자신의 존재를재일조선인처럼 ‘반쪽발이’적인 존재라고까지 자기 정체성을 표현했다. 그들에게 식민지조선은 일확천금의 땅이자, 새로운 정주지였다. 8.15 당시 조선에 70만 명이나 있었던 그들은 조선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식민지조선에 대해 강한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있었다.


감포의 식민지 시대를 알아가는 중에 앞선 이들의 연구는 많은 배움을 주었다. 박정석, 여박동, 김수희, 배석만 등의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어업과 식민이주어촌으로서 감포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최근 경주, 구룡포, 방어진의 지역향토사, 귀환일본인 연구가 축적되어 참고했다. 이 연구들을 통해 ‘식민이주어촌’으로서 식민지 시대 감포에 대한 자료조사에 들어갔다.


식민이주어촌의 시간과 공간을 살펴보려면, 식민자가 남긴 자료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일본은 수많은 조사자료와 통계를 남겼다. 1차적으로 일제 강점기 감포에 대해서는 일제의 통치기구가 남긴 <조선총독부관보>(1910-1945)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발행된 서적들이 있다. <관보>는 조선총독부가 매일 발행한 식민지 시대를 아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패전 후 귀환한 일본인들이 남긴 자료와 일본의 지방자치체가 발간한 향토사 자료들, 후쿠이(福井) 현사, 카가와(香川) 현사와 같은 자료들이 있다.


다음으로 당시 일본인들의 눈으로 본 감포는 당시 일본어 신문에 잘 드러난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일본어로 정보를 전달할 목적으로 만든 신문중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발행된 「조선민보(朝鮮民報)」,「조선시보(朝鮮時報)」「부산일보(釜山日報)」에 감포 관련 자료가 많았다. 재조일본인들의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원문은 전자자료로 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일제 강점기 감포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이제까지 별로 사용되지 않았기에 적극 활용한다.

「조선민보(朝鮮民報)」는 1905년 「대구실업신보」를 전신으로 하는 신문으로 1913년 「조선민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구에 본거지를 둔 경상북도에서 유일한 일간신문으로, 경주, 포항, 김천, 안동 등에 지국을 두고, 각 지역에 통신원을 두었다. �대구이야기(大邱物語)를 쓴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사장이었다. 감포에도 지국이 있었다.

「조선시보」는 1892년 7월 11일 창간된 일본어 신문으로 부산에 본사를 둔 일간 신문이다. 창간 당시는 상업 현황이나 무역 관계 기사 중심의 신문에서 휴, 정간을 거쳐 1914년 11월 2일 ~ 1940년 8월 31일까지 발행되었다.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발행부수는 1929, 1933, 1935, 1939년 각각 5,174부, 4,034부, 4,337부, 4,039부이다. 「조선시보」는 이후 「조선신문」으로 이어진다.

「부산일보」는 1905년 러일전쟁 중에 발간되었는데, 정식 창간일은 1907년 10월 1일로 되어 있다. 아쿠타가와 다다시(芥川正)가 창간하여 부산에 본사를 두고, 서울의 「경성일보(京城日報)」, 인천의 「조선신문(朝鮮新聞)」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에서 발행되던 3대 일본어 신문 중 하나로 꼽힌다.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남북도의 일본인 관련 기사를 게재하여,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잘 알 수 있다. 「부산일보」는 1928년 아쿠타가와의 사망 이후에는 가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가 사장을 맡았다. 그는 부산의 일본인 수산업계의 전설적 인물로, 한반도의 일본인 이주어촌에 수많은 그의 후계자를 만들어냈다.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발행 부수는 1929, 1933, 1935, 1939년 각각 14,195부, 15,556부, 17,455부, 18,107부이다. 「부산일보」는 지방신문이지만, 전국지적인 성격도 있어, 부산 외에도 경북, 강원, 전라, 서울에서도 배포수가 상당하였다. 감포에 대해서 많은 기사들이 실려 있는데, ‘감포’라는 색인어만으로도 610여 건이 검색된다. 같은 기간 「동아일보」에 120건이 검색되는 것과 비교해도 큰 차이이다. 이 점은 감포가 주요한 일본인 거주지 중 하나라는 위상을 잘 보여 준다.


<사진 2-부산일보 표지 1914.12.11>


또한 경주 권역으로서 감포에 대한 지리, 역사적 관련 자료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장이었던 오사카 킨타로(大坂金太郞, 필명 오사카 로쿠손(大阪六村)의 �취미의 경주(趣味の慶州)�(1931)가 있다. 「조선민보」에 1930년 9-10월 사이에 52회 연재한 내용을 가필, 정정한 것인데, 제5절 「수산업」편에 감포에 대한 기술이 있는데, 통계는 주로 1914년 이후 자료이다. 사진은 경주 읍내에서 사진관을 한 다나카 가메오(田中龜熊)가 찍었다.

다음으로 조선총독부 촉탁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의 <�朝鮮の人口研究>(1925), <朝鮮の集落>(3권, 1933), <生活狀態調査–慶州郡>(1934)이라는 자료가 있다. 그는 조선총독부 직원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늘날 ‘인구조사’와 같은 작업을 하여, 경주에 대한 상세한 사회조사를 남겼다. 특히 <생활상태조사–경주군>에는 감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오사카 킨타로(大坂金太郞)의 협력과 다나카 카메오가 촬영한 사진이 있다. 어업과 관련해서는 요시다 케이이치 <조선수산개발사>(박호원, 김수희역, 민속원, 2020)가 중요하다.


해방 이후 한국어로 발간된 자료 중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제작한 자료들을 많이 사용하였음에도, 유감스럽게 일본어 자료의 출처를 잘 밝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젠쇼 에이스케 <생활상태조사-경주군> ‘이민부락’ 기술

이민부락이라 칭하는 것은 내지인을 집단 이주시킨 부락을 가리키고, 양북면 감포리는 내지 어민을 이주시킨 어촌부락으로, 그 반수 이상은 가가와현(香川縣) 출신자들인데, 내지 농민을 이주시킨 농촌부락은 경주읍 외 안강, 모화, 아화를 비롯하여 각지에 집단, 혹은 산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동척이민(필자주-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장으로 이민)으로서, 자유이민은 비교적 소수이다. (304)

* <경주시사 제1편>(2007) ‘이민촌락’ 기술

이민촌락이라 함은 특수하게 일본이 집단이주시킨 정통성 없는(밑줄은 필자) 촌락이다. 양북면 감포리에는 일본인 이민이 이주한 어촌촌락이 있었으며 그 반수 이상이 일본국 가가와현(香川縣)에서 온 자들이다. 또 일본인 농민이 이주한 농촌촌락이 보문동 속칭 숲머리 및 안강, 모화, 아화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집단, 혹은 산재하고 있었다. 그 깊은 목적은 모르겠으나 그 대부분은 동척회사 농업이민이라고 했으며, 자유이민은 수효가 비교적 적었다.’(100)


후자가 전자를 활용한 문장인 것은 이민부락이 이민촌락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이 거의 동일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출처도 밝히지 않고, 그들이 남긴 자료를 사용하면서, 마치 그렇지 않은 양 기술해서야 ‘정통성 없는’ 역사가 된다. 식민지 흔적을 흔적으로 기억하고, 당당하게 그들의 기록을 활용해서 우리의 시각으로 그 시대를 다시 서술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깊은 목적은 모르겠다’는 것은 또 무슨 애매모호한 기술인가? 보문동 속칭 숲머리 및 안강, 모화, 아화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장이 있어,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농민을 대량으로 집단이민시킨 지역이다. 경부선 철도를 따라 일본인의 집단이주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 참고자료

박정석 (2017)<식민이주어촌의 흔적과 기억> 서강대학교 출판부

여박동 (2001.6)<근대 가가와현 어민의 조선해 어업 관계>『일본학보』47

김수희(2005) <일제 시대 고등어 어업과 일본인 이주어촌> 역사민속학

심재욱, 하원호 (2017.1)<일제강점기 동해 어족 자원의 수탈과 활용><숭실사학>제38호

배석만 (2006.04)<1930년대 식민지 朝鮮의 造船工業 확장과 그 실태>『지역과 역사』18

_____(2014) <한국 조선산업사: 일제시기 편> 도서출판 선인

조중의·권선희(2009)<구룡포에 살았다:일본 세토내해 어부들의 구룡포 역정> 아르코

(일본어판 趙重義·權善熙(2012)<韓国内の日本村-浦項九龍浦で暮した> アルク)

최부식(2019)<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 경주문화원

김진홍(2020)<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 <포항지浦項誌> 주해와 그 주변의 이야기들> 글항아리

차경환의 개인블로그 ‘My Identity’

(https://blog.naver.com/quixcha/222556494436)

‘釜山でお昼を’(http://busan.chu.jp/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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