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멀리 떠나-
이제 고향에 갈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고향과 관련된 몇몇 개인적 경험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향수」 1923)
(------)
고향은 멀리서 그리워하는 곳
그리고 슬프게 노래하는 곳
하물며 망가지고 이향의 거지가 된다 한들
돌아가는 곳은 아니리라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소경이정(小景異情)」,1913,필자 역)
정지용은 교토 도시샤에 유학 중에 가모가와 강변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노스탤지어’를 시 제목으로 삼을 만큼, ‘고향’은 시인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일본의 시인 무로 사이세이는 ‘고향’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멀리서 그리워하는 곳’이라고 했다. 고향을 떠난 이에게 고향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일지언정 현재의 장소는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시인들이 ‘고향’을 노래하는 것은,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나의 루트(root)를 찾는 것이자, 나의 루트(route)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우리의 기억과 흔적들이 축적된 ‘뿌리’이자, 지금 여기 나의 삶의 ‘경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일본과 조선, 그 후 식민지의 잔재와 흔적, 그리고 21세기에 20세기 근대 동아시아에서 진행된 이산(diaspora)의 역사는 끊임없이 고향을 잃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반복시켰다. ‘고향을 읽어버린 자’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그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동기는 여러 우연이 겹쳐서이다.
하나, 2019년 여름 고향 집에서 발견한 오래된 벼루함. 거기에는 벼루를 사용했던 이들의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이 어지러이 새겨져 있었다.
昭和十八年十一月二五日 文原文宗
(1943년 11월 25일 후미하라 후미무네)
1943년도면 전쟁 말기이고, 내가 자란 벽촌까지 창씨개명의 압력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문원공(文原公) 파 오문종(吳文宗)은 文原文宗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한 듯하다.
식민지의 상흔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흔적이 고향 집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일본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지만, 내 가족의 역사에 식민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직접 목도한 것은 처음이어서, 순간 전율이 일었다.
둘, 2019년 새로이 감포의 ‘해파랑길’이 정비되어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고향의 해변 길을 처음 걸어보고 충격. 과거에는 철조망으로 이어진 군사 지대여서 해병대 초소가 널려 있고,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간첩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자주 들었다. 출입이 금지된 군사 지대여서 새벽 해변에서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다 사살된 주민 이야기도 들렸다. 우뭇가사리는 일본에 많이 수출되는 해초였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한천(寒天)’의 재료다. 아이러니하게도 반공과 냉전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일본인이 남긴 흔적이 드러났다. 출입이 통제되었던 덕분에 남게 된 일본인이 만든 ‘인공수조’와 송대말 길은 내가 전혀 몰랐던 고향이었다.
셋, 궁금증에서 촉발되어 이리저리 검색하다 일본에서 제작된 <대직업별명세도 조선남부>(東京交通社,1930)라는 식민지 시기 감포 시가지도를 우연히 접했다. 감포는 일본인 동네라고 알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그 지역이 전부 일본어로 된 도로명과 인명으로 가득하고, 조선인 구역이 따로 옹색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지도를 들고 읍내를 걸어 보니, 시장통에서 읍사무소 사이의 구 일본인 거주지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넷, 고향에서는 1925년 개항 100주년을 맞아 전국 각지의 근대문화유산보존 바람과 맞물려 과거 일본인 거주 지역을 재정비하여 ‘해국길’이라 이름을 붙이고, 벽화도 그려서 관광자원화하려는 듯했다. 구룡포처럼 말이다. 지역 신문에서도 ‘개항 100주년’이라며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재소환하고 있었다. 지역주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지역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구 신천탕을 ‘1925감포’라 하여 문화공간으로 다시 만들기도 하고, 소식지도 만드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그 움직임에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누구나 감포의 일본인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일본인들은 언제 와서 어떻게 조선인들과 접촉했는지, 지금 남아있는 그 흔적들은 어떤 것인지, 정확한 자료가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일본인 가옥들 외에. 현재 부산, 방어진, 포항과 같은 큰 항구의 식민지 시기 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작은 지방 어항인 감포에 대한 기술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도 있다.
향수와 충격, 호기심에 <대일본직업별명세도> 뒷면에 실린 일본인 인명을 하나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 것이 이 글의 시작이다. 물론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간 식민지 출신 작가들의 문학을 읽어왔다는 개인적 이력도 작용했다.
아주 미시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감포’를 그 시대의 자료로 읽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경주, 구룡포 일본인의 역사를 서술한 서적이 연이어 발간된 것은 큰 자극이 되었다. 최부식의 <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경주문화원, 2018)는 당대의 동아일보, 사진, 일본인들의 자료를 활용하여 일제강점기 경주를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감포에 대해서도 9장에서 기술이 있다. 조중의·권선희의 <韓国内の日本村-浦項九龍浦で暮した>(アルク、2012., 한글 원본은 <구룡포에 살았다> 이 자료는 구룡포 답사 중 문화해설사께서 친절하게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감사드린다)였다. 감포와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구룡포 일본인들의 식민이주 흔적을 패전 후 일본으로 귀환한 식민 2세들의 인터뷰와 자료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두 저서를 필자는 흥미롭게 읽었지만, 고향 감포에 대한 부분은 충분하지 않아 더 궁금해졌다. 코로나팬데믹 기간의 이동이 여의치 않은 시기에, 대부분 식민지기의 일본어 활자자료에 의지했다. 그래서 발견한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는 감포에 대한 기사가 예상외로 자주 등장해서 흥미로왔다. 코로나가 끝나고, 일본인들이 집단 이주한, 대구, 김천, 경주, 구룡포, 거제의 식민지기 흔적을 답사하며, 화석처럼 남아있는 그 시대와 조우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
감포에 대한 ‘공적’ 기록을 가지고 ‘사적’으로 라는 단서를 붙여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고향에 대한 단순한 노스탤지어는 아닐까? 스스로 경계하며, 20세기의 식민지경험을 넘어 21세기의 탈식민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root는 route이기도 하니까. 개인으로서 나의 경험 위에 일본이라는 씨실과 문학이라는 날실로 엮어 본다.
p.s. 제목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넘어온 일본인들에 대해서 쓴 <그때 그 일본인들>(다테노 아키라, 한길사, 2006)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