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개척사업의 일환인 포교
식민지 시대 감포에는 일본 사찰이 4개소나 있었다. 일본 어민을 위한 것과 별개로 일본의 식민민지배정책이 확대되면서, 일본 불교도 조선인을 상대로 공격적인 포교사업을 전개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당시 경주 군내에 본원사파와 조동종의 포교소가 2개소인데, 그중 1개소는 경주 읍내, 1개소는 감포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주로 일본인들을 포교 대상으로 하지만, 일연종이나 진언종 성호 파는 조금씩 조선인에게 포교를 넓히고 있는 것도 확인된다.
1) 고야산 포교소
<대일본직업별 명세도>에는 감포 신사 바로 옆에 고야산(高野山) 포교소가 사진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진언종 고야산파의 절이다. 고야산 파는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라는 9세기 승려를 시조로 하는데, 원효처럼 당나라에 다녀와 일본에 불교를 확산시킨 인물이라서,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진언종 사찰 곳곳에 ‘홍법대사’라 쓰인 비와 마주친다. <도세 일반 경상북도편>(1934)에 보면, 경상북도에는 고야산 파는 극히 적은 인원의 일본인만 믿고, 조선인 신도는 한 명도 없었다. <생활상태조사-경주>(1934)에도 이 종파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소수의 인원이 있었던 듯하다.
일본 사찰 중에는 압도적으로 본원사파, 조동종 계열이 많았는데, 감포에 소수파인 고야산 포교소가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감포에 고야산 포교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시코쿠에서 이주해 온 어민들에게 많이 전파된 종파라 생각된다. 고야산 파는 도쿠시마에서 직선으로 바다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닿는 와카야마현 고야산에 있는 금강봉사(金剛峰寺)를 본사로 한다.
「조선총독부관보」 3176호(1923.3.15.)에는 진언종 각파 연합 고야산 대사교회 감포 지부가 1923년 1월 23일 포교소를 설치한다는 신고가 있다. 양북면 감포리 449번지이다.
「부산일보」 1927년 6월 14일 자에 「감포의 신법성(新法城)- 고야산 포교소의 상동식 거행」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포교소 신고는 1923년에 했지만, 경제적 이유로 지연되다가 1927년에 포교소의 단독 사원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양북 고야산의 사원 건립은 수년 전부터 신도들의 계획이었으나, 업계 불황으로 실시가 연기중이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신도가 크게 결심하여 부지 약 천 평(감포신사 인접지)을 구입하고 또 신도의 기부와 함께 부족액은 도이구치씨가 전액 대상(代償)하기로 하고 건축공사기 진행 중인 바, 착착 공사진행되어 10일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거의 전 시민이 집합하여 대단히 성대하게 치렀다. 동소는 감포 중앙부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감포 신사에 인접하여 준공 시에는 감포에 광채를 띄울 것이다. (「부산일보」 1927.6.14.)
감포항을 내려다보는 감포 신사 바로 옆 노른자위 땅에 절의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감포의 유력자 도이구치가 힘을 썼기 때문이다. 도쿠시마 출신 도이구치는 그 지역에서 번성한 고야산파 신도여서, 고야산포교소 건립에 적극적이었다고 추측된다.
2) 조동종 포교소
지도에서 보면 고야산 포교소 바로 위에는 조동종 포교소가 있다. 「조선총독부관보」 제2185호(1919.11.22)에 따르면 감포의 조동종 포교소는 1919년 11월 19일에 인가되었다. 일본 내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은 불교 종파는 정토진종 본원사파(本願社)와 조동종파이다. 조동종은 선종 계열 종단으로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큰 불교 종단 중 하나인데,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민비 시해에 관여하기도 하고, 친일단체 일진회와도 관련이 깊었다. 조동종 포교소는 감포 유력자 중 한 명인 후쿠이현 출신 다쓰노 산노스케와 관련이 깊다고 추측된다. 「부산일보」에는 쇠락해 가는 조동종 포교소를 다쓰노가 후원하여 재생시키는 내용이 실려있다.
3) 본원사 포교소
현 감포 공설시장 남쪽에 자리 잡은 본원사 포교소는 1930년 지도에 사원 위치가 나와 있고, 1934년 젠쇼 에이스케의 책에서도 본원사가 확인된다. 현재 감포 교회 근처 높은 지대의 감포 신사, 조동종, 고야산 포교소와 달리, 매립지의 일본인 거주지 근처에 있는 것으로 봐서 감포에는 비교적 나중에 들어온 종파로 추측된다.
본원사파는 현재 일본 불교계에서 신도 수가 가장 많은 대표적인 대처승 교단이다. 교토서본원사를 원조로 한다. 가장 일본적 색채가 강한 불교유파 중 하나로 12세기 신란(親鸞)이라는 승려가 염불만 외우면 극락왕생한다고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불교를 설파하고, 육식도 결혼도 무방하다는 파격적인 논리를 내세워 성장한 교파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에 이어 일본의 식민지 진출과 함께, 전국에 공격적으로 포교에 나섰다. 1898년 부산항에 임시 포교소를 세운 이래, 조선 각지로 뻗어 나가, 재조일본인과 조선인에게 포교 목적으로 사찰을 세웠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의 학교 설립, 교육에 힘을 썼던 종파이다. 일본에서는 절에 부속된 ‘데라코야(寺子屋)’가 서당처럼 서민들에게 읽고 쓰기, 산수와 같은 교육을 하고, 장례도 절이 담당한다.
감포 본원사 포교소는 강사 치바(千葉) 포교사를 초청하여, 보은강(報恩講)을 하였다. 예년대로 14일에서 16일까지 보은강을 하고, 17일 본사 전병사자에 대해 일대 법요가 이루어질 예정으로, 각 관계 방면에 안내장을 돌리며 준비하고 있다.(「부산일보」1938년 11월 17일 자)
1930년대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전쟁국면으로 넘어가, 각 사찰에서 위령제, 전병사자 위문을 하는 기사가 급증한다. 바야흐로 ‘전시’인 것이다. 1939년 10월 3일, 감포4리 445번지에 진언종 본원사파 정각사로 창립이 인가되었다. (「조선총독부관보」 3817호, 1939.10.7.) 이 시기에 총독부에 등록된 것으로 보인다. 주지가 다키구치 신카이(滝口信海)로 되어 있으나, 상세한 자료는 없다.
4) 일연종
13세기의 승려 니치렌(日蓮, 1222~1282)을 개조로 하는 불교 종단이다. 여러 경전 중 법화경을 가장 중시한다. 감포 시가 북쪽 ‘조선인 부락’ 바로 옆에 표시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늦게 자리 잡은 듯, 신도수도 적고 자료가 없다. 조선인 거주지엔 인접해 있다는 것은 젠쇼의 표에 경주군 조선인 신도수가 8명으로 기재된 것으로 봐서, 조선인에 대한 포교를 공격적으로 전개한 듯하다.
5) 해방 후 남묘호랑게교, 창가학회
일본의 불교는 해방 후에도 한국에 들어왔다. 1965년 한일조약체결 후 한일 간의 교류가 늘면서 전해졌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감포 읍사무소 맞은편 언저리에 흔히 한국인들이 ‘남묘호랑게교’라 부른 포교소가 있었다. 감포 읍내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종조부의 집에서는 늘 향 냄새가 나고, ‘남묘호랑게교’를 암송하는 소리가 났다. 뭔지는 모르지만 '왜색' 종교라고 어슴프레 짐작했던 것 같다. 고향 동네에는 ‘회관’으로 불리던 그 분원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남묘호랑게교’는 일본의 국제창가학회가 한국에서 불리던 이름이었다. 그들이 외우는 주문인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なむみょうほうれんげきょう)’이 ‘남묘호렌게교’로 우리 귀에 들렸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공명당을 창당한 종교단체이다. 군소정당이지만, 자민당의 의석수가 부족할 경우 연립하여 거대정당을 만들어주는 캐스팅보드 역할을 하기에 일본 정치에서 우습게 볼 수 없다.
한국에서는 수도권과 영남에 신도가 많고 100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현재는 한국창가학회(SGI)로 불린다. 현재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바로 앞에도 SGI 간판이 보인다. 한국창가학회 홈피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해서 많은 문화회관을 전국에 지었다고 한다. 고향에서 부르던 ‘회관’이 그것이었다. 교세가 확장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왜색종교라는 비판도 언론에 등장한다. 해 뜨는 동쪽을 보고 절을 하니, 식민지시대 일본 천황이 있는 곳을 향하여 ‘궁성요배’하던 기억을 한국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것도 당연하다.
종교는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의 식민지배정책과 함께 일본의 종교들이 해일처럼 밀려어 공격적으로 퍼져나간 걸 보면. 또 한일국교가 성립되고, 다시 일본 종교가 퍼져나간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