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마에서 온 스와키
# 다카하시조선소
감포는 항구였으니, 배를 수리하고 만드는 조선소와 철공소가 필요했다. 현재도 감포조선소(경북 경주시 감포읍 감포로 11길 20-50)가 있는데, 식민지시대 지도에는 조선소가 두 군데 보인다.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는 다카하시(高橋) 조선소와 이마니시(今西) 조선소가 등장한다. 현재 감포로를 따라 북쪽 해안가에 다카하시조선소, 남쪽으로 내려와 이마니시조선소가 있었다.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스와키 철공소 있고, 현재 횟집들이 몰려있는 선착장 근처에 감포철공소가 있었다.
<사진-대일본직업별 명세도 중 상단 발췌 번역>
다카하시 조선소는 감포읍 북쪽 에비스초 오른쪽 바닷가에 면한 지역에 있다. 현재 감포파출소 근처이다. 다카하시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지만, 사진으로 보면 2층 건물의 사무소와 배를 건조하는 작업장도 넓어 상당한 규모였다고 추측된다.
<사진-다카하시조선소와 사무소>(출처:「대일본직업별 명세도」중)
# 이마니시조선소
이마니시조선소는 「대일본직업별 명세도」 직업 소개에 ‘분(分) 공장 선인장(船引場)및 쓰시마(對馬島) 산 목재 소매소’라고 되어 있다. 분공장은 선박의 도포나 도료 등을 작업하던 공장의 의미이다. 선인장은 배를 끌어들여 작업하는 공간이다. 배를 건조하기 위해서는, 좋은 재목을 구해야 했다. 쓰시마 산 편백나무(檜)는 재질이 단단하고 향이 좋아서 유명했는데, 이를 수입하여 판매하였다.
본군(필자주:경주군)에서 어업에 사용되는 어선의 총수는 1931년 현재 426척이다. 그중 목선(패선筏船), 조선형 선박은 겨우 10여 척이고, 그 외는 전부 내지형 및 발동기선이다. 그 선박을 건조하는 소위 배목수 (선장船匠)는 상당히 숙련된 기술을 가진 내지인(일본인)이 많아서, 비교적 우수한 선박을 군내에서 건조할 수 있다. (젠쇼,1934:460-461)
경주군에서 규모가 있는 항구는 감포가 유일했으니, 인용부는 감포 상황을 가리킨다. 당시 상당한 배건조 기술을 가진 일본인들이 와있었다고 추측된다. 아래 사진은 다카하시조선소인지, 이마니시조선소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건조 중인 선박은 전형적인 일본식 어선이다.
<사진-감포항 조선소(젠쇼, 1934:460-461)>
# 감포철공소
철공소도 감포 철공소와 스와키 철공소가 있었다. <대일본직업별 명세도>에 매립신마치 1정목(현재 감포로 2길) 감포금융조합 바로 옆에는 감포철공소가 있다. 감포철공소 맞은편 고타(幸田) 상점의 주인 고타 고이치가 경영하였다. 발동기 제조 및 수선을 하였다. 고타에 대해서는 상세한 정보가 없지만, 1935년 감포학교조합의 간사를 한 것으로 나온다.
<사진-감포철공소, 스와키철공소 (출처-「대일본직업별 명세도」에서 발췌)
# 스와키철공소
스와키 철공소는 나니와초(현재 감포로 남단)에 있었는데, 스와키 라쿠조(洲脇樂造)가 경영하였다. 스와키 철공소는 여러 기계 제조 및 일반 철공업이라 되어 있어, 감포 철공소보다는 규모가 작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스와키’는 일본에서도 희귀성으로 전국에 820명 정도가 오카야마와 구라시키시 근방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오카야마에서 건너온 일본인으로 추정된다. 오카야마현은 가가와현과 마주보고 있고, 경주 군내 제5위의 일본인 출신지이다. 1921년에 도이구치 등과 어업면허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초기부터 감포에 정착한 인물이라 추정된다.
또한 영일군 장기면 양포리에 위치한 조선양포제빙(합자)과 양포제빙냉장(주)의 대표는 오다 한타로(小田半太郞)이고, 스와키는 이사로 되어 있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27-1942) 구룡포와 감포 사이에 있는 양포에도 일본인들이 이주했는데, 전국에서도 많지 않던 제빙공장이 1928년에 설립되었다. 얼음을 사용하여 신선한 상태로 해산물을 일본에 운반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식민지조선에서 정착하여 어업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시설들이 하나둘 감포를 메꾸어 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