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부는 어떻게 축적되었을까?

-감포어업조합

by 뚜벅이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 감포철공소 옆에 감포금융조합이 있고, 나니와초에 감포어업조합이 있다. 일본인들은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조합을 일찍부터 조직했다. 감포어업조합은 1922년 11월 9일에 설립되어, 어획물위탁판매사업, 어업금융사업, 공동구입사업, 폭풍경보신호 및 항로표식사업, 조난구휼 및 구호사업을 했다고 되어 있다. (젠쇼,1934:475-478) 이에 따라, 방파제 건설, 매립사업, 등대 설치를 했다.

어촌인 만큼 감포 경제에 어업조합 소속 일본인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부산일보 경북 편」(1929.4.28.)에 감포어업조합 임원으로 회장 다쓰노, 감사에 마쓰오카, 김연중(金烟重), 미즈시마가 당선되었다고 전한다. 다쓰노는 후쿠이현 어업단을 이끌고 1917년에 감포에 집단이주를 시작한 인물이다. 일본인 중심의 어업조합이지만, 조선인도 있다. 1924년에 ‘감포어업조합, 주영석(朱榮錫), 신원술(申元逑), 김규형(金奎滢), 김석기(金錫基), (주)오히데구미, 후지모토 한지로, 오다 켄타로, 하마모토 오토마스(濱本音松)’가 어업면허를 취득하였다. (「조선총독부관보」,1924.06.07) 조선인은 4명이고, 그 외 전부 일본인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숫자가 비슷하게 보이나, 일본인은 조합이나 주식회사 형태로 면허를 취득하였으니, 실제로는 일본인의 훨씬 규모가 큰 셈이다.


젠쇼 에이스케는 <조선의 취락>에서 각 도별 어업조합을 조사했다. 감포어업조합은 양남이나 구룡포와 비교하면, 조합원수에 비해서, 선박수, 어획고, 공동판매량, 사업자금, 어업권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일본인들의 감포항이 성황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표-도별 어업조합조사>(1931년 말)(젠쇼, 1933:792)


감포의 어업이 성황이던 1930년대에 감포어업조합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감포어업조합이 일본에 고기잡이하러 간다는 기사이다. 감포 앞바다에서 많은 고등어가 잡힐 무렵인데 일본까지 가서 고등어를 잡는다는 내용이다.

불황과 구매력의 감퇴로 극도로 힘들어진 경북도 해안 어민은 작금 호어기임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어가(魚價)의 하락으로 완전히 곤란해져, 이를 보충하기 위해 올해부터 매년 휴어기를 이용하여 후쿠이현, 이시카와현, 시마네현의 먼바다로 출어해서 고등어의 대량어획을 예정하고, 실제 지난 5월부터 약 50척의 발동선이 출어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바야흐로 약 50척을 거느린 감포어업조합이 근일 중 내보내기로 하였다. (「조선신문」1931.7.12)


1930년 태풍으로 감포항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 어획고나 판매액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때문도 있지만, 일본 본토에서 시작된 공황의 영향도 있었다. 이른바 ‘쇼와공황’이라고 불리는 1927년의 금융 공황으로 시작해 1929년의 세계 공황을 거쳐 1930-1931년에 최고조에 달한 1945년 이전 일본에서 가장 심각했던 일련의 공황을 가리킨다. 이 공황을 거치면서 일본은 전쟁 국면으로 급격하게 돌입한다.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의 경제도 극도로 위축되었다. 구매력이 없으니, 물가가 떨어지고, 불황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는 소규모 일본인 상공업자들도 대량으로 나왔다. 어업도 그 영향을 비껴가지 않아서, 생선 가격이 내리고, 많이 잡아도 이득이 나지 않아, 그들이 떠나온 일본 바다까지 다시 돌아가 어업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락한 가격을 더 많은 양으로 메꾸려는 셈이다. 안 그래도 약탈적인 식민지 경제에 대공황까지 가세하여, 식민지 일본인들의 경제도 휘청하였다.

1935년 7월 9일 자 「부산일보」에는 고등어 성어기를 맞이한 감포의 소식이 전해진다. 고등어 성어기를 맞이해서 어선들이 속속 감포로 돌아와서, 배 1 척당 5-6천 마리 어획고를 예상하고, 고등어 주낙(연승)도 1 척당 1천 마리를 예상한다고 한다. 그만큼 감포 앞바다는 고등어 반, 물 반의 좋은 어장이었으니, 매립으로 항만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공사가 완공되지 않으면, 성어기에 임시 어판장이나 하역장이 불편하여, 생선판매가 어렵기 때문이다.


1935년에는 감포어업조합이 중심이 되어 1930년 태풍으로 유실된 항만을 만들기 위해 새로이 제2차 해안매립공사를 한다.(「부산일보」1935.7.9.) 매립사업에 어업조합이 열성적이었던 이유는 감포의 어자원이 풍부해서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4년에 1차 매립 허가를 받은 이후, 감포는 시가지가 협소하여 지속적으로 매립이 이루어졌다. 감포어업조합에 1500평의 매립이 허가되어 7월 5일 입찰에 5개 사가 응모하였다. 밀양 도다구미(戶田組)에 최저가로 낙찰되고, 165,000원에 계약이 체결된다. 1935년 7월 7일 착공하여, 11월 20일까지 준공 예정으로 해안도로에서 해면까지 남북으로 90미터, 동서 60미터로 건설한다. 신도로의 해면 쪽은 공동판매소로 이용하고, 구도로 쪽 택지는 조합사무소 창고 및 기타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매립 사업은 시간이 더 걸린 듯하다.


감포어업조합의 매립지는 준공기한까지 남은 시간 30여 일로 임박하여, 주야로 공사를 하고 있다. 약간의 해중 작업 곤란과 설비 불충분으로 진행이 순조롭지 않다. 기한까지 준공이 어려운 규모이다. (「부산일보」1935.10.29)

감포어업조합은 6월 완성 예정이던 매립 공사가 12월까지 지연되자, 준공을 촉구한다. 구룡포도 마찬가지였다.


감포를 다룬 일본어신문에는 감포의 ‘풍어’ 소식을 다룬 기사가 많다.

▲ ‘백만 원을 드디어 돌파 ; 감포어업조합의 활약’

1939년 공동판매고가 151만 원, 전년도 95만 원을 훨씬 넘었다. 전년보다 56만 원이나 초과하는 실로 꿈같은 이야기라고 하며, 그 원인은 대부건착망, 뇌수망(瀬手網) 기타 대소어업이 대풍어였고, 생선 가격이 높게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연내 2백만 원을 돌파하는 것도 예상된다. (「부산일보」1940.4.19)


기사에서 보듯이, 동해안 어장에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까지 삼치, 고등어, 정어리가 떼로 몰려들어 엄청난 어획고를 보여준다. 이에 따라 감포어업조합도 막대한 이익을 낸다. 일본인 유력자 도이구치는 1940년 어업조합장이자 감포읍장이었다. 감포라는 좁은 지역사회에 천 명 채 안 되는 일본인들이 경제, 행정, 정치를 다 장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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