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는 항구를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한 고장이지만, 농촌이기도 했다. 나의 부모님은 조부 때부터 사과 농사를 지었다. 대구가 사과로 유명한데, 언제부터 감포에서 사과 농사를 지었던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사과농사 시작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현재는 토종 능금은 거의 사라지고, 주로 서양 능금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최초로 서양 능금을 재배한 것은 선교사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가 대구 구 제일교회부지 정원에 1898-1899년 경에 심은 것이라 한다. 1900-1901년 경에 상업적인 대규모 과수원은 아담스 목사와 존슨 목사가 대구 동산병원 구내 언덕에 만들었는데, 미국 미주리주에서 사과 묘목을 가져왔다고 한다. (석태문, 이호철, 2001:257-259) 그 후 일본인들이 대구 지역에서 사과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대구에 권업모범장 대구 지소가 생겨 본격적으로 사과재배에 대한 연구와 주산지로 개발되어 갔다.
1920년도 「신라 고도 경주지」에 경주 시내에 마쓰다, 후루타, 우메하라 과수원 등 일본인들의 과수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과수 농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34년 젠쇼는 이미 경주 동척농장으로 집단이식된 일본인들이 과수농사를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경주군은 경상북도 굴지의 농업 적지이고, 내지인 농가의 대부분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민으로 내동, 강서, 서면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과수농사로 배, 사과, 복숭아, 감, 포도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사과는 국광이 제일 많고, 홍옥, 왜금, 아사히, 축 순으로 8,194그루나 심었다고 한다. (젠쇼, 1934:394)
1917년 경상북도 과물동업조합이 설립되고, 이 조직이 1957년 경북능금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 추령재를 넘어 감포에도 과수농사가 들어왔을 것이다. 추령재를 넘어 바닷가로 오면 논은 점점 줄었다. 감은사가 있는 양북은 대종천을 끼고 논도 좀 있지만, 만성적으로 물 부족인 감포는 밭이 많았다.
1960년대에는 대구 경북지역 사과 생산량이 전국의 87%에 이르러, 사과 상자에는 ‘경북능금’이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1970년대 감포에서는 여전히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품종인 ‘국광’과 ‘홍옥’이 많았는데, 점점 1980년대부터 ‘후지(富士)’를 비롯한 새로운 사과가 많이 재배되었다. 맛이 새콤한 홍옥, 심심한 국광, 퍽퍽한 스타킹 대신, 아삭거리고 훨씬 달고 저장성이 높은 후지가 점유율을 높여갔다. 이 사과 품종들이 전부 일본 종자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식물 종자의 자립은 쉽지 않았다. '후지' 품종이 1965년에 들어왔다고 하니, 농협에도 한일국교정상화의 여파가 밀려온 것이다.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청산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한일국교정상화는 한일 양국에서 반대가 많았지만, 박정희정권은 몰아붙였다.
1990년대 농산물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졌다. 바나나와 오렌지를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사과농사는 내리막길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한 하나의 움직임이었겠지만, 1992년 능급조합에서 우리 사과로 만든 '주스'를 처음 만들어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기억이 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어업 장악, 해방 후 농업에서 일본종자의 독점, 1990년대의 수입농산물 개방(개방이 아니라 침공이 맞겠지만)을 보면, '식민주의'로부터 탈각한다는 것이 일상에서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사과꽃은 벚꽃, 배꽃처럼, 봄이면 온 밭을 연한 분홍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였지만, 사과 농사는 고되고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봄에 농사를 시작할 무렵이면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황을 시작으로 태풍이 지나가는 9월 말까지 수없이 농약을 쳤다. 동네 아지매들을 놉해서 여름 내내 풀을 매고, 적과하고, 농약치고, 추수하고, 포장하고, 팔고, 겨울에는 가지치기로 쉴 겨를이 없었다. 과수 농사는 힘은 많이 들고, 가격은 늘 널뛰는 작물이었다.
사과 농사는 종조부가 시작했다고 한다. 고방(庫房)이라 부르던 오래된 사과 창고가 과거의 흔적을 보여준다. 흙담으로 만들고, 지면보다 아래로 50센티미터 정도 아래로 파서 온도를 서늘하게 유지한 창고였다. 영특하고 셈이 빠른 할매는 쪽진 머리를 하고 월남치마 속에는 전대를 차고, 농사지은 사과를 리어카에 싣고, 감포 곳곳을 누볐다. 사과 농사를 지어 대가족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공부시켰으니, 우골탑이 아니라 사과탑이었다. 1980년대 부친은 열심히 조합을 다니며, 새로운 종자,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지만, 늘어나는 것은 빚이었다.
이제 감포의 사과 과수원의 자취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방치되고, 베어졌다. 고향은 전국에서도 가장 인구가 적은 지역 중 하나이다.
<참고자료>
류창기 < 100년 역사와 전통의 대구경북능금농협><원예산업신문>(2017.12.04)
석태문·이호철「경북능금산업의 발달과정」<농촌사회>11(1), 2001.06.
善生永助 <調査資料 第40集 生活實態調査(其七) 慶州郡> 朝鮮總督府,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