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8.15 감포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by 뚜벅이


감포를 쥐락펴락했던 일본인들은 8.15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패전에 따라 해외의 군인·군속과 일반인은 일본으로 귀국시킨 것을 일본어로 ‘히키아게’(引揚·인양)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귀한이란 용어로 통일한다. 1945년 연말까지 남한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 인양자는 약 47만여명이다. 1945년 9월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을 약 66만명으로 추산된다. 동시에 일본에 있던 재일조선인들도 조선으로 귀환하고, 귀환하지 않고 남은 이들은 재일조선인이 되었다.


감포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귀환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구룡포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남긴 자료에서 그 상황을 유추해 보건대, 패전으로 감포에 거주한 많은 일본인들도 어선으로 귀환한 듯하다. 구룡포 일본인 식민이주의 일등 공신인 도가와 사브로의 아들 도가와 가오루 (十河薰, 1912-2005)의 회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종전이 되었다.

구룡포는 북조선에서 피난온 피난민과 내륙에서 온 귀환자로 넘쳐났다. 구룡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고향을 떠나 있던 구룡포의 일본인 주민들도 돌아오고, 그 사이에 조선인들이 ‘조선자치회’를 조직하여 활동해서 마을이 붐볐다.

그러나 9월이 되고 나서는 현저하게 사람이 줄고, 남아 있는 사람은 치안 관계 주재소장을 비롯해서,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자치회가 배를 준비해서 귀환하라고 요청했다. 그때 나와 오노 하루이치 이외는 전부 구룡포항을 뒤로 했다. 나와 오노는 태어난 고향을 뒤로 하고 결코 일본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다. 10월이 되어, 우리들은 소학교에 주둔한 미군에게 불려가서,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도록 명령받았다. 우리들은 미군 헌병의 호위를 받아 부산에 갔다. 부산항 부두에서 인양선 명우선(明優丸船)에 인도되어, 그 배로 쓸쓸하게 일본에 돌아왔다. (趙重義,2012:138-139)


도가와는 식민2세로 구룡포에서 태어나 구룡포를 고향으로 생각했다. 패전이 되고 나서도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없이 1945년 10월까지 구룡포에서 버티었으나, 미군의 명령으로 즉각 귀환하게 되었다. 이미 이때는 민간 어선을 함부로 이용할 수 없어, 부산으로 가서 공식 인양선을 타야 했다.

패전국민이 되어 조선에서 일본으로 쫓겨나는 일본인들은 피지배자들의 그간의 폭압에 대한 분노와 보복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배를 타기 위해 동해안의 항구로 몰려들었다. 9월이 되면 최소한의 인력 외에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감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패전후 앞을 다투어 일본인들은 부산에서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부산에서 뜨는 공식 인양선은 귀환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해안가에서는 어선을 이용해서 북한에서 내려오거나 경주나 대구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귀환하였다.


패전 무렵을 기억하는 또 다른 구룡포 주민의 회상이다.

일본 사람들 나갈 때, 거의 다 배가 있었으니까네, 다 뭐 그 배로 가는데 손 딱 흔들고...그 다음부터는 일본 사람 구경을 못해요. 싹 나오지를 않아요, 안 나와 가지고 한 집씩, 한 집씩 전부 모르게 가요, 가는 것도...이시하라 사카에가 갈 때는 내가 알았는데, 오카다 에이라고 수산하던 사람도... 구룡포 사람들은 잘 가라는 말만 했어요. 뚜드려 패고 그런 거는 일절 없었어. (박정석, 2017:103)


어촌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선박을 이용해서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식민2세였던 도가와 가오루처럼 이미 조선이 자신들의 터전이 되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남긴 건물이나 어선들은 일본인 아래서 일하던 조선인들이나 주위 지인에게 일시적으로 양도된 것들이 많았고, 이때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청산’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일본인이 남긴 ‘적산’으로 한몫 잡은 사람들이 해방 이후 다시 지역의 유지가 된 경우도 많았다. 일본인들은 나갔지만, 그들이 남긴 시가지, 건물, 기술, 말에 그 상흔들이 남았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로 다시 일본과 교류가 이루어지자, 귀환한 일본인들이 다시 한국을 찾아 과거의 기억과 장소, 묘지, 재산을 찾아 탐방하는 물결이 쇄도했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일본인들은 시일이 지나,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며 여기저기서 식민지 조선의 학교동창회, 향우회 모임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구룡포 출신 일본인들은 도가와 가오루가 중심이 되어 ‘구룡포회’를 1978년에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회원리스트도 만들었다. 대구 출신들은 ‘구우회’, 방어진 출신들은 ‘방어진회’를 만들었다. 수원 매산소학교 출신들은 ‘수원심상소학교’ 일본동창회를 만들었다. 어딘가 감포 출신 일본인들도 모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교류하며, 그 시절을 회상하는 지도 모른다. 식민주의로 탄생하고 식민주의로 사라진 조선의 ‘고향’에 대한 기억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구룡포의 경우처럼 대부분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회한으로 점철되어 있고, 식민지배에 대한 성찰은 찾아보기 어렵다.


식민지 시기 감포로 어업에 진출한 식민의 역사는 일본 향토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후쿠이현사(福井縣史)>, <가가와현해외출어사(香川縣海外出漁史)>, <가가와현어업사(香川縣漁業史)>의 일부로 남아, 식민주의에 대한 성찰없이 자랑스런 일본인의 해외원양어업, 식민어업의 일부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에게 그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침략자였고, 수탈자였고, 이웃하여 살았던 이들로, 여전히 지금 여기에 식민주의의 흔적을 남겨놓은 이들이다. 감포의 일본인 거리는 자랑스런 근대문화유산도 아니고, 싹 쓸어버려야 할 유산도 아닐 것이다. 식민주의의 상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로서, 우리에게 지금 탈식민을 묻고 있지 않은가?


<참고자료>

박정석 <식민 이주어촌의 흔적과 기억>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7.

조중의·권선희 <구룡포에 살았다:일본 세토내해 어부들의 구룡포 역정> 아르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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