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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만한 당신 Dec 14. 2020

말을 예쁘게 하던 사람

우리는 헤어졌지만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 요즘 네일을 할 수 없어 속상하다는 말에 “그럼 내가 네일 하는 거 배울까? 그럼 너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잖아.”라고 답하던 사람.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넌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말을 해?” 내가 늘 감탄하며 말하면, 그 사람은 “난 몰랐는데,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알았어. 덕분에 내가 고맙고 기분이 좋아.”라고 답하곤 했다. “오늘 왜 이렇게 예뻐?”같은 애정표현을 스스럼없이 하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며 상대를 배려하며 말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이었다.      


그런 너와 끝이 다가온다는 걸 안 건, 그 예쁜 말들 사이에 가끔 숨길 수 없는 너의 본심이 배어 나올 때였다. 비가 꽤 오는 밤이었고, 나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라 우산이 없었다. 전날 우리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조금 서늘한 밤을 보냈고, 찜찜한 마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향했었다.      


“우산 안 가져갔지? 너 버스 내리는 데 마중 갈게.”

“어.. 응! 그래 주면 난 고맙지.”     


너의 마중 온다는 말에 반갑고 설레다가, 네가 어젯밤 우리의 다툼에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에게 중요한 가치관에 대해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꽤 고민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우산을 나눠 쓰고 아무 일 없었던 듯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친구랑 뭐 했어, 한강에서 맥주 마셨어, 안 추웠어?, 조금 쌀쌀하더라, 너는 해야 할 건 좀 마무리 지었어?, 응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집 앞에 다다랐을 무렵, 근처 문 닫은 카페의 차양막 아래 나란히 섰다. 빗소리가 더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얘기하다가 내가 너무 강하게 말한 것 같아, 미안해. 불편하게 한 거 같아서 마음이  쓰였어.”

“아.. 나도 좀 그랬는 데. 근데 그건 서로 다른 부분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 왜 이렇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냐.”     


탄식처럼 내뱉은 그 사람의 말에 나는 베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내가 너의 어떤 부분을 아쉬워했듯, 너 또한 그랬겠구나. 너에게도 내가 충분한 상대가 아니었구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그 사람의 말에 새삼스럽게 알게 됐다. 일에서, 학업에서 여러 가지로 고생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를 만난 것이 아마도 꽤나 기쁘고 설레는 일이었을 텐데. 결국 그 관계에서조차 갈등이 일어났으니 얼마나 삶이 제멋대로라고 느꼈을까. 서로가 기대한 서로의 모습은 각자가 채울 수 없는 노릇이라는 걸, 우리는 서서히 알게 됐다. 그와 비례하듯 천천히 멀어졌다. 마지막 인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였다.      


      



1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친구와 동네의 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모서리만 둥글게 마감한 크고 긴 사각형의 테이블 두세 개가 카페 공간의 전부라, 들어오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과 합석하는 느낌으로 긴 테이블 어딘가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아야 했다. 방금 들어온 커플이 내 대각선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인기척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가 남자의 옆모습을 봤다. 옆에 앉은 여자 친구를 꽤나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고, 여자 또한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의 볼을 만지며 웃고 있었다. 남자가 웃으며 “나 살쪘지.”하니, 여자가 “아니야아, 안 쪘어. 보기 좋아.”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인데도 남자의 얼굴을 알아봤다. 남자도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쳐다봤다. 눈이 잠시 마주치고, 남자의 긴장된 얼굴 표정이 읽혔다. 나는 책으로 다시 시선을 향하곤 혼자 미소를 지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온 남자는 아마도 내가 있는 내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맞은편에 앉은 친구에게 그만 일어나자고 말했다. 가방을 챙겨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시선을 주었다. 남자도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마주하곤, 고개를 돌려 나왔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통창으로 된 카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어 거리로 나간 뒤에야 친구에게 말했다.     



“내 대각선에 앉아있던 커플 봤어? 전에 잠시 사귀었던 사람이야.”

“아, 진짜? 나 얼굴 못 봤는데.”

“네가 얼굴 봐서 뭐해.”

“여자 친구랑 같이 온 거였어?”

“응. 난 이렇게 쩔어 있는데 걔는 얼굴 좋더라.”

함께 까르르 웃었다.      



좋아 보였다, 말을 예쁘게 하던 그 사람. 나는 여전히 왜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지 때로 한탄하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너는 마음 가는 대로 편안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어 보이네.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너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네 옆에, 내 옆에 서로가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라고, 사실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네가 갖지 않은 모습을 네게 바라고 애써주길 바랐던 미숙했던 그때의 내가 안타깝고, 서로의 다름을 성숙하게 조율해가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나는 여전히 그런 게 미안하다. 지금의 너와 그 사람은 서로에게 충분한 사람이기를, 우리가 가끔 걸었던 길을 걸으며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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