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지독한 일주일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_03

by 빨간나무




첫 치료는 1달 동안 입원을 한다고 했다. 소아암병동에서 나갈 수가 없다.



낯선 침대를 배정받았다. 커튼 사이로 투병 중인 아이들이 살짝 보였다.


우리 아기는 저만큼 아프지 않은데 왜 소아암병동으로 왔을까? 모르겠다. 백혈병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자주 아팠고, 열이 2주간 내리지 않았고, 알 수 없는 피멍이 생겨났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부풀었고, 수혈을 계속 받아야 된다니 따를 뿐, 그뿐인데... 그런데 그게 백혈병의 증상이란다.


혈소판이 낮아서 노란 피를 수혈받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빨간색이 아닌 노란색의 피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이 세계가 너무나 낯설었다. 수혈을 받아도 정상적인 혈액세포가 없으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눈물만 났다. 여기서 먹고 자고 생활해야 하는데 필요한 물품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울면서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아기와 단둘이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했다.







막내는 다른 쪽 손에 수액 라인을 하나 더 잡았다. 이제 양손에 바늘이 꽂혀있다. 마음이 미어졌다. 수액이 들어가는 구멍 외에 채혈이나 수혈을 받을 때 써야 하는 곳이 또 필요하다고 했다. 혈액암 환자들은 매일 피검사를 해야 하므로 줄이 연결되지 않아도 바늘을 지녀야 했다. 중심정맥관 시술을 하기 전까지는.


아기들은 혈관이 얇아서 금방 막히고 찾기도 힘들다. 원래도 3~4일마다 교체하는데 손이나 발을 아무렇게나 움직이니 3일이 되기 전에 빠지거나 새거나 막혔다. 양손, 팔목, 팔오금, 발목, 발등 등 이틀에 한 번꼴로 새로운 곳을 또 찔렸다. 암병동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 멍투성이였다. 혈관이 터진 자리는 며칠간 다시 못 썼다.


간호사 선생님이 여기저기 만지며 혈관을 찾는 동안 아기는 땀범벅이 되어 울었다. 우는 아이를 꽉 잡느라 나도 탈진했다. 이렇게 확보한 바늘의 기능을 수시로 점검했다. 몇 시간마다 식염수를 넣었고 막히면 뚫느라고 펌핑을 했다. 펌핑을 하다 뚫리지 않으면 다시 다른 곳을 찔리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도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었고, 이내 선생님이 근처에 오기만 해도 울었다. 말도 못 하는 아기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래서 병동 보호자들이 차라리 중심정맥관 시술을 하고 나면 편하다고 했다.




암병동에 온 지 1주일 뒤, 중심정맥관 시술을 했다. 또 전신마취를 했다. 수술실에 다녀온 아기는 가슴 위를 모래주머니로 지혈하며 힘없이 누워있었다. 환자복에 피와 갈색 소독약이 묻어있었다. 아기는 계속 울었다. 말을 잘 못하니 아플 거라며 진통제를 놓아주셨다.


나도 같이 울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중심정맥관이 생기고 나서 바늘에 찔리는 일이 줄었다. 여기로 수액을 맞고 채혈도 하기 때문이다. 양손이 자유로워져서 장난감을 잡고 놀 수도 있었다. 수술 흉터를 차마 볼 수 없어 난 또 펑펑 울었지만 우리는 점차 백혈병 환자로 적응하고 있었다.




치료가 시작되고 며칠 후, '산정특례자 동의서'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영상을 틀어주고 잘 볼 때 겨우 원무과를 방문했다. 설명을 들었지만 사실 뭔지 잘 몰랐다. 일단 사인을 했다.


암환자는 산정특례자로 등록되어 5년간 병원비 혜택을 받는다. 사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보험공단에서 산정특례자 선정 문자가 왔다.


그때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오진일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 문자에 또 무너졌다. 이 작은 아이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암환자'가 되었다.


장기입원환자의 경우 1주일마다 중간 정산한 치료비 봉투가 전달되었다. 산정특례 혜택을 받기 전에 매주 800만 원가량 찍혔고, 39일 후 퇴원할 때 3000만 원의 병원비가 청구되었다. 그러나 산정특례자가 되자 환자부담은 약 500만 원이었다.


암환자 지원 혜택을 내 아이가 받을지 몰랐다. 지금은 그저 감사하다.





믿을 수 없는 진단서




“셋째가 백혈병이에요.”


죽기보다 하기 싫은 그 말을 내 입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 금방 닥쳤다. 휴가와 휴직을 쓰기 위해 진단서를 첨부해야 했다. 처음에 ‘폐렴’이었던 진단서가 ‘백혈병’으로 바뀌었다.


다음으로 매일 아침 아이들을 봐주러 오시던 등원 선생님께도 연락을 드렸다. 이 분 덕분에 5년 만에 복직을 했는데 5개월 만에 아기가 아파 다시 휴직을 했다. 믿을 수가 없지만 현실이었다. 선생님과 울면서 전화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어린이집 원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둘째가 함께 다니는 곳이라 이미 막내가 입원한 소식은 알고 계셨지만 최종 병명이 백혈병일 줄은 다들 모르셨다. 나도 몰랐으니까.


진단을 받고 며칠 후, 퇴소 의지를 밝혔다. 대기하는 아이들이 많은 곳이라 하루빨리 자리를 넘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원장님께서도 어차피 다니지 않는다면 가정양육수당이라도 받으라고 조언해 주셨다. 퇴소 완료 문자가 정말 씁쓸했다.


그리고 며칠 후 시부모님께서 남아있던 막내의 짐을 받아오셨다. 낮잠 이불, 로션, 칫솔 등 막내가 건강했을 때 쓰던 물건이 주인이 없는 집에 되돌아왔다. 선생님도 우시고 시부모님도 우셨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전달받은 나 역시 펑펑 울었다. 그저 절망, 끝이 없는 절망이었다.




바늘에 찔리고, 하루 3번 이상 쓴 약을 억지로 먹이고, 전신마취 시술이 있으면 금식을 해야 했다. 끔찍한 수술방과 여러 가지 검사. 숨 쉬듯 채혈과 수혈을 했다. 이곳에서 아기는 많이 울었다. 아픈 아기를 간병하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갑자기 서지도 걷지도 못해서 내내 안고 다녀야 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신체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암병동에 온 지 3일 만에 쇼크로 아기가 쓰러졌고 그 이후 더 붙어서 살펴야 했다. 식판을 갖다 놓거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힘들었다. 미래를 꿈꾸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저 살아서 나가자.


기진맥진한 상태로 아기를 달레고 나면 그제야 나도 울었다. 잠든 아기를 아기띠로 안고 폴대를 밀면서 하릴없이 복도를 뱅뱅 걸었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꺼풀이 다 짓물러 따가웠다. 입맛이 없어 한 숟가락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살이 쑥 빠졌다. 그토록 목표하던 몸무게가 되었는데 퇴원 때까지 모르고 살았다. 나중에 집에 가서 거울을 보니 흰머리가 십여 개 솟아있었다. 머리카락까지 애썼다. 그럼에도 나를 돌볼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최소한으로 먹고 자고 싸는 시간만 겨우 가졌다.


한동안은 그 당시 찍은 사진을 보지도 못했다. 사진을 보면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해맑게 밥을 먹는 모습을 봐도 눈물이 났다.


처음 1주일이 제일 힘들고 잔인했다. 지독했던 그때 내 시간이 멈춰있다. 그 후에는 진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고, 조금씩 적응을 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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