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_24

by 빨간나무


첫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설마 백혈병은 아니겠죠?”


골수검사를 앞두고 별생각 없이 여쭈어봤을 때, 소아과 병동의 선생님들은 손을 내저었다. 백혈병은 전혀 아닐 거고, 혹시나 ‘혈구탐식성조직구증’을 의심하지만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 소아과 선생님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급성 백혈병입니다. 내일부터 치료를 시작해야 하니 짐을 싸두세요.”


낯선 의사 선생님이 찾아와 차분하지만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골수검사를 하고 나서 6시간 후 우리는 소아암병동으로 전실했다.



이송 사원이 도와주셔서 캐리어와 가방, 유모차 등 많은 짐을 챙겨 쫓기다시피 나왔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위쪽으로 올라갔다.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소아암병동은 제한구역








20층 2 병동,


소아혈액종양 병동 입구는 ‘제한구역’이라는 빨간 글씨가 선명했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믿기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간호사 선생님이 맞아주셨다. 캐리어를 소독하고 손님용 실내화를 나눠주며 병동 규칙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기는 코로나 전부터 마스크를 쓰던 곳이에요. 밖에서 쓰던 유모차는 들고 올 수 없고, 병동 전용 유모차가 있습니다.”


같은 병원이지만 일반 소아병동층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소아암병동은 완전히 통제되었다.


‘균이 번식할 수 있고 소독이 불가능한’ 물품들은 반입 금지였고, 환자는 병동 밖에 나갈 수도 없으며, 심지어 병동 내에서도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 있었다.


물품은 모두 살균하거나 멸균, 일회용만 허용되었고, 개봉한 생수도 4시간이 지나면 폐기해야 했다. 외부 음식도 당연히 안 됐다. 애착인형, 이불, 장난감도 모두 소독이 안 되면 폐기해야 했다.


이전에는 허용되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금지되었다.


남편은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고, 아이와 나는 낯선 병동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저녁 8시쯤 막내가 밥을 찾기 시작했다. 수혈을 받고 전실하느라 저녁밥을 먹이지 못했다.


일반병동이라면 같이 편의점에 가서 골라올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환자는 나갈 수 없다. 또한, 끓이거나 멸균·밀봉 처리된 가공식품만 반입 가능했다.



아이는 계속 맘마를 찾아 울었고, 나는 어찌할 바 몰랐다.


햇반에 물을 말아서라도 먹이고 싶었다. 그런데 멸균 식품이 아니므로 병동 규칙에 맞지 않아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간곡히 부탁드리니, 입원 첫날인 오늘만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평소에 아무 제한 없이 먹는 햇반을 여기는 먹을 수 없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다.




백혈병이라는 무거운 현실과 이 병동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아픈 경험만 가득한 병원에서 엄마가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애착인형을 쥐여주고 자극적인 영상을 틀어준 뒤, 미친 듯이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지하 편의점에서 햇반, 김, 실내화, 일회용 숟가락 등을 사고 의료기상에서 액와체온계도 샀다. 다시 올라와보니 징징 울고 있었다.


햇반을 데워 김에 싸서 먹이는 내 손이 계속 떨려왔다. 맘마를 먹게 되어 다시 밝아진 표정의 아이를 보니 눈물이 났다.


‘나을 수 있을까? 잘 견딜 수 있을까?’


밤이 되자 불은 꺼지고 병동 전체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막내가 계속 울어서 도저히 침대에 머물 수 없었다.


안고 복도를 걷다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첫날엔 다들 그렇다며 처치실에 간이침대를 마련해 주셨다. 감사하지만, 나와 조금도 떨어져 누워 잘 리 없다.


이곳이 싫다. 너무 싫어 나가고 싶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틈날 때마다 백혈병에 대해 검색해 봤다.


어려운 용어와 무서운 말만 가득했다. 기록이 끊겨있는 SNS를 보면 눈물이 펑펑 났다.






다음 날 아침, 담당 교수님이 오셨다.


“B세포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으로 진단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4주간의 첫 치료가 시작됩니다.”


소아암병동으로 옮겨 17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세상은 반전되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치 앨리스의 토끼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나는 막내와 고립되었다. 믿기지 않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혹한 처치와 시술을 받았다.







이제는 막내의 컨디션이 좋아져서 집에서의 생활이 익숙한 듯 흘러가고,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만 가슴 한편은 꽉 막혀 있다.


그 동안 병원에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모든 것들. 감각들이 무뎌지고, 적응했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고 있다.


괜찮지가 않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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